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입니다. 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노래지요. 보도에 뒹구는 낙엽과 홍시 빛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시선은 타인에게서 자신에게로 향하고, 외연보다는 내면으로 향하는 순간 속에 우리는 문득 철학을 하게 됩니다.

도서관에서 성인 독서회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11월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솔직히 처음엔 시큰둥했습니다. 이미 세 번이나 읽은 소설이어서 제법 안다-줄거리에 불과했지요-고 생각했고, 청소년 필독 도서-헤세는 이 소설을 40대에 썼습니다-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도 재독을 위해 다시 ‘데미안’을 펼쳤습니다. 아, 저는 무지하고 방종했습니다. 저는 순식간에 나이만 먹고 덩치만 커진, 어린-성숙하지 못한-싱클레어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데미안’은 십 대의 나와 이십 대의 내가 분명히 읽었던 소설인데도 처음 읽는 듯 새로웠습니다.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막스 데미안 같은 성숙한 인간이 되어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저는 여전히 싱클레어였으니까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너무도 유명해서 오히려 무심히 읽히는 명문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니 저는 여전히 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설 ‘데미안’을 읽다 말고 바닥으로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마른 이파리를 속절없이 바라봅니다. 철든 건 저 이파리뿐일까요.

헤르만 헤세는 철학의 나라, 독일 출신의 작가답게 철학적 소양이 깊습니다. 또한 불교 철학에도 정통해서 소설 ‘싯다르타’를 쓰기도 했습니다. 소설도 그렇지만 철학은 더더욱 사유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글과 말이 상당히 난잡해지는데 헤세의 글은 쉽고 사유는 탁월합니다. 헤세의 사진을 보니 마른 얼굴의 날렵한 코 선 위에 걸쳐진 작은 안경, 다문 입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글을 쓰는 그의 표정에서 자발적 고독을 추구하는 예민하고 기민한 은둔자의 성정이 읽힙니다.

헤세가 현존해 대표적인 성격 유형 검사인 MBTI(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를 받아 본다면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요. 16가지 성격 유형 중에 INFP가 그의 성격에 가까워 보입니다. MBTI는 두 개의 태도 지표(외향-내향, 판단-인식)와 두 개의 기능 지표(감각-직관, 사고-감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 4개의 알파벳 문자로 성격 유형을 나눕니다. 그중 INFP는 열정적인 중재자형 성격으로 내향적이며 감각보다는 직관을 우선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판단보다는 인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울리는 직업으로 작가 미술가 디자이너 같은 예술가가 많은 걸 보니 제 예상이 그리 틀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어쩌면 대문호 헤세를 저와 같은 INFP로 묶어 저의 별스럽게 예민하고 예리한 성정을 변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거짓말에서 시작해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도록 방황하는 싱클레어가 헤세의 소설적 자아일 텐데 그런 싱클레어에게 동질감을 느끼니 결국 저는 헤세를 닮은 게 아닐까요. 보편적 사유를 과대 포장, 해석했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데미안’을 읽는 가을입니다.

‘데미안’을 다시 읽으니 새롭게 읽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지금 난 알고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는 것을.’ 주변인이던 사춘기에는 알기 어려웠고 이삼십 대에는 알면서도 이러저리 회피했습니다. 불혹에 들어서니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 돌아온 누이 같은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섭니다. 아, 나는 아직 선과 악, 운명과 기질, 아이와 어른 같은 두 개의 세계, 나의 세계를 어수선한 발걸음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내년 가을에도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읽어 보려 합니다. 그때의 나는 어느 세계에 있을까요. 알려주세요. 나의 헤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