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좀 늦게 여길 왔나 보다. 작년처럼 10월에 이 길을 걸었다면 대추 크기의 꽃사과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을 텐데. 물론 봄에 왔으면야 꽃잔치 벌이는 광경을 봤을 테지만.
풍기역에서 내려 금선정으로, 소백산 자락길 2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노라면 임실 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 지점의 길가엔 관상용 사과나무를 가로수로 조성해놓았다. 중추쯤이면 꽃사과 열매가 한창 빨갛게 익어, 가을 앵두인 줄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꽃사과나무 중에서도 데코벨이라는 품종의 열매는 앵두같이 빨간색을 띤다니까. 그래서 케이크 장식용으로 많이 쓰인다는데, 나그네 눈에는 가을 운치로도 제격이지 싶다.
이 꽃사과 열매는 수확해서 먹지는 않지만, 과즙이나 당도 면에서 식용으로 흔히 먹는 사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나는 이 길을 지나갈 때면 서너 개를 따가지고선 양손에 쥐고 간다. 호두알 굴리듯 두어 번 손아귀에서 굴려 사과 향기를 맡는 기분이란!
이번에도 잎은 지고 떨어질락 말락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 중에 서너 개를 땄다. 실컷 콧노래도 불러가며 웬만히 향기에 취했다 싶을 즈음, 자락길 어디쯤의 큰 돌 위에 그것들을 올려놓았다. 새나 곤충들이 배고플 때 찾아와 먹도록. 사람한테는 비록 관상용 역할을 할 뿐이지만, 새나 곤충들에겐 식량 역할도 톡톡히 해주므로 얼마나 다목적인가. 저 조그만 것들이.
높은 산을 오를 적에 종종 절벽에 붙어 자라는 소나무를 본 일이 있다. 그때마다 어떻게 바위틈에서 저리도 자랄 수 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일부러 관상용 소나무를 거기다 옮겨 심지는 않았을 테고. 한번 보라지. 그 바위 틈새에 흙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으며, 뿌리를 내리려 해도 그 단단한 돌에다 어떻게 붙박겠느냐고. 그런 소나무의 키는 커봤자 한두 뼘 정도이지 않던가.
관상용 소나무야 자주 전정을 해서 그렇다지만, 저 높고 위험천만한 절벽의 자연적인 소나무가 작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분명 그 주변에 있는 소나무의 씨앗이 발아해서 자란 나무일 테니 말이지. 그렇다면 절벽의 소나무는 인위적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자 생명력 유지의 비결이란 말 아닌가.
저 자신인들 왜 쭉쭉 크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선은 척박한 바위틈에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서도 그렇겠지만, 절벽에 붙어 버티기 위해선 일부러 자라지 않는 절제를 배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높이에, 그 절벽에, 강풍이 몰아치면 가지는 물론이고 뿌리째 뽑혀버릴 텐데, 크는 길로 택하는 건 자살골과 다름없지. 그래서 생존의 법칙을 낮은 데로, 작은 길로 택한 건 아닐는지.
인위적으로 태어난 꽃사과나무도 열매만 보면 식용 사과나무의 크기에 비해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꽃이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며, 향기나 과실의 기능 역시 식용 사과 못지않다.
하나 꽃사과나무든 절벽의 소나무든 제 생명을 지키며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시에 나오듯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는 예사로 맞아야 한다. 작은 열매, 조그만 나무라고 해서 어찌 고난이나 역경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작은 것들의 생명력도 존중받아야 할 필요가 있고,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도 찬사받을 가치가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한 슈마허의 주창은 광고용으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경제적 차원이든 생태적 차원이든 작은 것들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며, 또 인간과 자연에 유익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여 언제, 어디서나 작은 것들을 위한 기도는 내 마음에 아름다움을 새기는 동시에, 내 욕망의 절제를 위한 리추얼(ritual)이다. 눈으로 즐기고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임을 알기에. 지금, 땅에 떨어진 저 꽃사과나무 열매들을 바라보는 마음 또한 같다. 끝까지 제 살을 곤충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게 있으면 거름으로 돌아가도록 제 역할 다하고 가는 삶이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