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영화의 바람이 부산으로 분다. 올해도 열흘간의 축제 바람(BIFF)이 화려한 폐막식으로 끝났다. 레드카펫을 걷는 신예 감독의 패기 있고 달뜬 표정, 세계적 거장의 의기로운 발걸음, 조각 같은 미남 배우의 유려한 손짓, 드레스 여신들의 우아한 미소, 그리고 누구보다 분주한 스태프들,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나도 해마다 게스트로서 하루 서너 편의 영화를 보았고 리뷰를 쓰거나 심사나 토론 등에 참여를 해왔다.

내가 아는 영화꾼들도 평소에는 데면데면하거나 소식이 없다가도 영화 철만 되면 안부를 묻고 대화방을 만들어 오로지 영화 삼매경에 빠진다. 감독들의 신작은 물론 배우의 사생활까지 꿰뚫고 있는 식지 않은 열정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에도 카톡방의 열기가 뜨거웠다. 그들은 각자가 고심하여 짠 시간표를 공유하고 티켓 교환도 시도하며 출연 배우들과의 미팅 정보도 소개한다. 최대의 관심사는 관람 후기이다. 호평과 혹평에 따라 시간표는 급조정되고 취소표를 찾느라 마니아들의 손가락은 예매 창에 광클릭을 해대었다.

반면 나는 세심하게 영화를 고르는 편은 못 된다.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도 있지만, 이미 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는 것만으로도 작품성은 인정되었을 터. 개봉이 예상되는 인기작보다는 배급사에서 외면할 것 같은 비주류를 좋아한다. 지루한 다큐멘터리와 신화나 역사나 전설이 등장하는 영상물과 아프리카나 아시아 빈민국이 배경인 영화를 먼저 선택한다. 듬성듬성 앉은 자리에서 마니아들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똑같은 영화를 보고도 호불호가 갈린다는 사실이다. 인생 영화였다는 극찬이 있는가 하면 ‘지뢰를 밟았다’는 혹평도 이어진다.

기대와는 달라서 러닝타임을 지키기가 고통스러울 만큼 관람이 힘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뢰를 밟았다’고 표현한다. 내게도 영화제 때마다 견디기 힘든 영화가 늘 한두 편씩 있었다. 목이 없는 주검 장면은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언어가 달라서 인지 내용이 번잡해서인지 도입부터 엔딩까지 인물들의 싸우는 듯한 고함에 귀가 먹먹하여 헛웃음만 난 적도 있다. 정액을 한 바가지 삼키는 장면을 본 날은 입맛이 싹 달아났고, 가학적인 묘사로 자신의 이빨을 뭉텅 뽑아낼 때는 도중에 영화관을 뛰쳐나오고 말았으니, 지뢰를 밟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고 도망쳤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일수록 언론에서는 철학적 해석까지 덧입혀 극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나의 편견은 매번 작품의 의미를 헤아리는 데 방해만 해대었다.

몇 년 전 상영된 영화 ‘마인 Mine’을 떠올린다. 제목에 ‘지뢰’라는 뜻이 담겼듯이 아프리카 사막 한가운데서 지뢰를 밟고 고립된 젊은 군인이 주인공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생존의 몸부림을 펼친다. 열사의 폭염 뒤에 찾아오는 극심한 갈증과 혹독한 추위와 허기와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목숨을 노리는 야생늑대가 다가와도 발밑의 지뢰 때문에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지뢰가 터지고 두 다리가 잘려 나가는 환각증세, 한숨도 잘 수 없는 지옥의 밤, 썩어가는 발과 함께 오물을 마시며 견뎌낸 공포의 시간들. 호송 차량은 점점 늦어지고 죽음이 눈앞에 닥친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넌 계속 나아가야 해. 앞으로 나아가야 해.” 그가 두려움을 딛고 한 걸음 발을 떼기로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지뢰는 폭발하지 않았다. 일흔두 시간 동안이나 힘겹게 밟고 있던 것은 겨우 장난감 병정이 담긴 낡은 깡통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한낱 두려움과의 사투를 벌인 것이다. 지뢰는 밖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박혀있었다. 그것을 넘어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번에도 영화제가 끝나고 올해 영화에 대한 의견들로 분분했다. 나 역시 잔혹하거나 노골적이거나 가학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지뢰를 밟았다’고 단정 지은 작품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결국 그 설정도 내가 쌓은 장벽이며 스스로 놓아둔 올무에 불과하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을 지뢰라 여긴다면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달프겠는가. 처음부터 지뢰는 없었다. 레드카펫을 걷는 배우들처럼 당당하게 딛고 나아갈 일이다.

문학평론가·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