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온갖 오물이 쌓인 저수지의 진흙탕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숭고한 일이다”. 16대 국회부터 정치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정치인들과 만나면 가끔 한 말이다. 손발은 진흙범벅이 되고, 옷에 흙탕물이 튀더라도 국민과 함께 묵묵히 ‘꽃’을 피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신뢰가 쌓이고 더 큰 일을 맡게 된다. 이런 말을 함께 나눈 정치인들은 한국정치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냈다. 더러는 정치권에서 여야의 원로나 중진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이도 있다.
반대로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벼 타작’에 나오는 ‘양반’처럼 ‘정치놀음’에 빠지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백성은 구슬땀을 흘리며 타작에 정신이 없는데, 그림 속의 양반네는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누워 곰방대를 물고 있다. 그는 지배자와 감독자의 눈으로 백성을 주시한다. 이런 류의 정치인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정감사장에서 핏대를 올리는 이들의 상당수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다. 대신 유력 대선후보의 창이나 방패 노릇으로 자신의 정치생명 연장을 꾀한다.
정치의 가치는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우리 사회의 과제를 해결하는 권능을 제대로 행사할 때 빛난다. 하지만 이번 대선전의 전개 양상은 실망스럽다. 한국 정치가 오물로 뒤범벅된 저수지에서 꽃을 피우는 소명을 포기한 것 같다.
역대 대선은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국가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가’라는 본질은 놓치지 않았다. 여야 내부 경선과 본선은 국가를 어디로 끌고 갈지를 놓고 치열한 토론과 경쟁이 있었다. 물론 그 때도 상대 후보를 향한 비난과 의혹 제기가 있었다. 검증과 비방의 경계를 넘나든 사안도 있었다. 하지만 대선전의 본류는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명제였다. 대체로 안보는 진보의 경우 ‘햇볕정책’(김대중 정부), 보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박근혜 정부)의 범주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경제는 분배(진보)와 성장(보수)이라는 기본 입장 위에 현실경제에 맞춰 어떤 정책수단이 더 유효한지를 놓고 대결했다. 복지 논쟁과 미래산업정책, 기초과학기술 발전정책 등 국가 미래과제를 세우고 대비했다. 정부의 기능 조정과 권력기구, 교육과 문화, 심지어 역사기술의 문제 등 해묵은 개혁과제들도 대선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완했다. 정치는 대선과정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선진국에 진입했고, K방역의 기적을 만들고, 한국형 우주 발사체 ‘누리호(KSLVII)’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은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해답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눈만 뜨면 ‘대장동’과 ‘막말’이 선거판을 뒤덮는다. 국민은 정상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수준의 선거전이 무한반복되고 있다. 차분하게 질문을 던져 보자. 이번 대선에서 코로나 19로 가중된 국민의 고통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는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극단의 선택을 할 정도로 힘든 상황에 대한 차기 정부의 대책은 어떤 것일까. 4차산업혁명에서 미래산업정책의 좌표는 제대로 짚고 있는가. 미친 집값 대책은 뭔가. 양극화에 따른 계층·세대·지역·젠더 갈등을 해소하고 공동체를 지켜갈 대책은 뭔가. 고령사회 진입 속에 불안한 노후 걱정에 대한 대비와 청년들의 고통에 대한 미래정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빗장을 걸어 잠그고 무력시위에 열을 올리는 북한문제, 미중 간의 패권다툼 속 한국의 대응, 일본과의 해묵은 관계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국가운영의 기본틀인 현행 헌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극복할 새 헌법에 대한 비전과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있는가.
차기 대선을 불과 4개월여 앞두고 있지만 국민은 어느 후보에게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번 대선전을 두고 뜨겁긴 한데 더럽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이다. 대선후보들이 ‘돼지’와 ‘개’를 입에 올리는 수준이니 ‘이전투구’라고 한들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더 많이 준비하고 갖춘 인물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상희 ㈔녹색삶지식원 이사장이 7년 전 인터뷰에서 강조한 말이다. 정치에 몸을 담은 적도 있지만 과학기술계의 ‘이어령’으로 불릴 정도로 혜안을 가진 원로의 말은 가볍지 않다. 선거는 후보에게 검증의 시간이다. 하지만 후보 검증에만 매몰된다면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 국민이 처한 오늘의 문제, 국가와 민족의 앞날이 걸린 시대적 도전에 맞서는 실력을 검증해야 한다. 국민은 현실의 고통을 덜어 줄 대책이 뭐냐고 묻고 있다. 후보들은 답할 준비가 됐나.
서울본부장 kksho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