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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독서의 계절 /김진식

‘아이네아스 이야기’ 저자 베르길리우스, 세상 아픔에 대한 공감…세계인의 시인 만들어

  • 김진식 로마문학 박사
  •  |   입력 : 2021-10-13 19:22:19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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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제 운명이 있다(habent sua fata libelli)’.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같은 책도 팔자가 달라진다. 미술사학자 김용준은 생활고를 못 이겨 책들을 내다팔았다. 마침내 아끼던 ‘강희자전’마저 헌책방에 가져갔다.

큰 대접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너무하다 싶을 만큼 값을 후려치는 책방 주인에게 마지못해 책을 넘겼다. 돈이 생기면 되찾을 요량으로 그는 뻔질나게 드나들며 책이 무사한지 확인했고, 마침내 한 달 만에 웃돈을 조금 얹어주고 책을 빼앗다시피 찾아왔다. 책을 아끼는 서생(書生)의 마음이 애틋하다.

서양에서도 사람들이 손때 묻혀 읽고 모두에게 사랑 받은 책이 많지만, 책의 팔자를 따지자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 이야기’만큼 기막힌 것도 없다. 저자 베르길리우스는 트로이아 전쟁과 트로이아 유민의 방랑을 다룬 이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역사와 신화의 현장을 직접 봐야 했다. 알프스 남쪽의 만투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하고 나폴리에서 살았던 이탈리아 시인은 그리스의 신선한 바람과 빛나는 풍광을 그저 상상만 할 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무사히 여행을 마쳤지만, 아테네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열병에 걸렸다. 배가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 브룬디시움에 그를 내려놓았을 때도 차도는 없었다. 시인은 그곳에서 기원전 19년 9월 21일에 사망했다. 그가 10년을 공들여 쓰던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미완의 유고로 남았고, 고인은 그의 원고를 태워 없애주길 친구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무기와 사내를 노래한다(arma virumque cano)’로 시작하는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애당초 세상에 나올 팔자가 아니었다. 조금씩 시인이 읽어주는 원고를 들었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시인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고 기어코 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야기 속의 아이네아스는 망국의 통한을 안고 트로이아를 떠나, 유민들을 이끌고 지중해를 떠돌며 해가 지는 서쪽 땅 어딘가에 있다는 이탈리아를 찾아 나선다. 오랜 방랑 끝에 이탈리아의 티베리스강 하구에 도착해 아이네아스가 나라를 세우니, 그의 아들은 율리우스 집안의 시조가 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율리우스 집안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평화를 되찾고, 폐허의 로마를 재건하던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사업에 베르길리우스의 장엄한 신화적 층위를 보태고, 더불어 그를 (재)건국의 영웅으로 칭송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자는 원고가 태워 없어지는 것에 반대했고, 기어이 동료 시민에게 읽히려고 억지를 부렸다.

‘내 영혼의 반쪽(animae dimidium meae)’ 베르길리우스는 결국 뜻하지 않게 아이네아스 이야기를 통해 팔자에 없이 엄청난 독자를 만났다. 시인의 뜻에 따라 원고가 태워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강력한 힘과 빛으로 독자를 불러 모았다. 해방 노예 출신의 에피로타라는 학교 선생이 제일 먼저 그 광채를 보았다. 그는 이 책을 학교 교재로 채택했는데, 책이 기원전 19년 출판된 직후, 그 짧은 시간에 책의 가치를 알아본 학교 선생은 도대체 얼마나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재가 되자마자, 로마의 힘이 뻗어나간 지중해 어디에서나, 히스파니아에서,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리스에서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읽혔다. 그리스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열렬한 독자로 수도 없이 그를 인용하고 주석을 붙였다. 그리고 로마가 없어진 후에도 베르길리우스는 팔자에 없이 세계인 모두의 시인으로 남았다. 중세 사람들은 베르길리우스를 모방한 ‘아이네아스 소설’에 열광했다. 프랑스에서 롤랑의 노래가, 독일에서 니벨룽겐의 노래가 탄생했다. 르네상스 초기의 단테는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를 스승으로 모셨다. 유럽을 대표하는 한 지식인은 1561년 이렇게 선포한다. “베르길리우스는 고전문학의 모범으로 호메로스를 넘어섰다”.

‘세상의 눈물, 사람 일은 사람 마음을 적시는 법(sunt lacrimae rerum et mentem mortalia tangunt)’. 아이네아스 이야기의 놀라운 운명은 황제의 찬양과 칭송만으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한 시대를 풍미한 절대 권력과 함께 사라져버리지 않았을까? 시대를 넘어 계속해서 위대한 영혼으로 옮겨 붙은 불꽃은 무엇이었을까? 서생의 눈에 들어오는 작은 하나는 공감의 불티였다. 거친 파도와 사나운 바람에 난파한 트로이아 사람들은 낯선 땅에 내린다. 굶주림과 추위를 추스르고 정찰에 나선 아이네아스는 새로 건설 중인 도시로 다가갔고, 거기에서 트로이아 전쟁을 그린 신전 벽화를 보았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세상에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마음을 사람들이 기꺼이 공감해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마문학 박사·정암학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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