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연휴 때 ‘삼국유사’를 통독했다. ‘삼국유사’는 흥미롭고, 체제가 정연하며, 서술·참조·인용의 수준이 높고, 오랜 세월에 걸쳐 세심하게 기획한 책임을 거듭 느꼈다. 아직 제대로 해석·발견되지 못한 측면이 많음을 또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삼국유사’(1289년)는 고려 때 나왔는데, ‘삼국사기’(1145년)보다 늦게 편찬됐다. ‘삼국유사’는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 시대를 주로 담았다. 물론 단군·고조선·가야를 비롯한 소중한 고대사도 실었다.

통일된 신라가 935년 망하니 이 해를 기점으로 ‘삼국유사’는 신라가 없어진 지 354년 만에 출간됐다. ‘삼국유사’에는 한반도의 역사·문화·삶·지리·종교·신화·설화가 다채롭게 실렸다. 특히 지배자·상류층이 아닌 민중 관점에서 이해하고 다듬고 서술한 일화가 숱하게 있다. 민중의 심성·관점·세계관·욕구가 박혀 있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특징에 주목한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이 당대의 국가 공인 최고 지식인이자 종교인이었음은 기록에 비춰 명백하다. 일연 스님 생애를 살피면 수행과 삶의 거처를 자주 옮기며 평생 고려 땅 곳곳을 순례했고 민중의 이야기를 듣고는 ‘삼국유사’에 기록·반영했다. 고려 민중이 1200년대에 일연 스님에게 들려줬을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이야기는 수백 년에 걸쳐 민중의 삶 속에서 발효된 고갱이였을 것이다. 민중은 심성에 따라 어떤 기억은 버리고 어떤 사건은 간직하며 강화했을 것이다.

공동체마다 생각과 마음의 특색은 있다. 한국인은 ‘춘향전’을 한민족 심성의 원형처럼 간직해왔다. ‘춘향전’은 사랑 이야기이고, 신분질서는 뛰어넘어버리며, 싸워도 말(言語)로 싸우고, 해학이 작렬하며, 단판이 아닌 ‘삼세판’ 형태 전개는 기본이다. 이웃 일본에서 우리 ‘춘향전’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다는 ‘주신구라’(충신장)에서는 마침내 주군을 위해 복수하고 명예를 지키는 데 성공한 아코 번의 무사 46인이 한날한시 한 자리에서 함께 목숨을 놓는다. 이렇듯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고려 민중은 무얼 기억하고 간직했을까. 거기 담긴 ‘민심’은 뭘까?

‘삼국유사’의 ‘감통(感通)’에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계집종 욱면이 염불하다가 서쪽 하늘로 올라가다)’ 이야기가 있다. 부자·남자·귀족들(상류층 주류다)로 볼 수 있는 불교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절을 세우고 1만 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어 득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귀진(貴珍)이라는 벼슬아치 집안의 계집종 욱면이 힘든 노동을 부지런히 다 해놓고 그들 곁에서 열심히 염불했다. 어느 날 염불하던 욱면의 몸이 솟구치더니 법당 대들보를 뚫고 서쪽 하늘로 가버리면서 먼저 득도했다.

법당 천장을 뚫고 승천했다는 민중의 상상력이 박력 있고 걸림 없고 통쾌하다. 오늘 관점으로 읽으면, 상류층·부유층·지식인·지배층에 대한 서늘한 경고장이다. 가진 것 믿고 까불지 마시란 얘기다. 낮고 작고 진실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백성의 지혜와 정성은 아주 저력이 크단 뜻이다. 여기서 고려 민중의 민심을 읽는다.

‘감통’편 맨뒤에 실린 짧은 이야기가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정수 법사가 얼어 죽게 된 여자를 구하다’)다. 작가 박경리 선생이 저서 ‘일본산고’에서 한민족 심성과 미의식을 담은 이야기로 꼽았다. 눈 쌓인 추운 겨울날 정수 스님이 경주 황룡사에서 천엄사로 돌아가다가 절 문밖에서 아기를 낳고 얼어 죽어 가던 여인(氷女)을 발견하고는, 불쌍히 여겨 안아서 몸을 녹여주고 옷을 벗어준 뒤 자신은 벌거벗고 뛰어서 절로 돌아와 거적만 덮고 밤을 새웠다는 일화다.

민중은 사회 리더급 인사의 이런 진정한 마음과 선행을 잊을 수 없었기에 간직했다. 그 뒷이야기도 주목해야 한다. 왕궁 뜰에 하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룡사 승려 정수를 임금의 스승에 봉하라!” 왕은 사연을 알아본 뒤 정수 스님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오늘 관점으로 풀면, 장관 임명이나 국회의원·대통령 당선이다. 민중은 ‘이 정도 인품과 품격은 있어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선거 운동이 한창인 요즘, 이 이야기를 후보들에게 들이밀어야 한다.

‘탑상(搭像)’ 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를 뺄 수 없다. 두 사람은 승려다. 어떤 여인이 달달박박의 처소에 와 곤경에 처했다며 자고 가기를 청하나 달달박박은 계율을 내세워 거절한다. 노힐부득은 ‘불쌍히 여겨’ 여인을 받아주고 정성껏 보살폈다. 알고 보니 이 여인은 관음보살이었다. 이 이야기는 결말이 중요하다. 부득뿐 아니라 뒤늦게나마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박박도 함께 부처가 된다.

이 이야기를 간직한 민중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백성이 부처이고, 민심이 천심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헛되고 붕 뜨고 악의에 찬 공리공담과 정쟁을 넘어, 국민 삶에 실제로 보탬이 되는 따뜻한 정치를 편다면, 지지하겠다.

선임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