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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친절이 고생하는 시대 /권명환

  •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  |   입력 : 2021-09-14 18:51:07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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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감정 노동자들의 사연을 진료실에서 만난다.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 가운데 10명 중 4명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무관하게 일해야 하는 감정노동자에 속한다. 이들은 친절을 강요받으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억눌러야만 하고 그럴수록 겉과 속이 다른, 부조화 현상을 겪게 된다.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가 가까워야 정신적으로 편안한데 감정노동자들은 웃다가 병에 걸린다.

감정노동자들은 막말에 익숙해서 상처를 덜 받지 않을까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동안 내가 만난 분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사람의 마음은 상처를 받게 되면 과거의 비슷한 상처까지 모조리 소환하기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 맞은 데를 또 맞고 아물지 않은 부위가 다시 터진다. 악성 민원인이 아주 별난 사람일 것 같지만 평소 인격자로 알던 사람이어서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내용을 가지고 화를 내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화를 내는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다. 특유의 레퍼토리가 “너 나 무시해?”로 시작해 자신의 억눌린 화를 민원을 핑계 삼아 폭발하는 것이다.

악성 고객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갑질에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존재하는데 그 뿌리에는 열등감이 있다. 제발 나를 알아달라는 허약한 자존감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열등감은 아무데서나 폭발하진 않는다. 화풀이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함부로 화풀이를 해도 뒤탈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을 때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 행동에는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되풀이 해온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화풀이를 해도 먹히고 뒤탈이 없다는 경험이 축적되면서 악성 민원이 일상화된다. 갑질이란 새로운 노선이 형성되는 것이다.

감정노동자 입장에서는 싸우거나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얼어붙은 채 일방적으로 당하는 사례가 많다. 그럴 때는 화가 난 사람과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화를 내는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민원 내용을 중심으로 성실히 응대해도 소용이 없다. 안타깝게도 악성 고객은 화를 내는 순간부터 공감능력이 제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무 애쓰다 보면 자신이 먼저 탈진해 버린다.

악성 민원인은 협박범과 심리적으로 유사한데, 협박범은 상대가 두려워하면 더 심하게 협박하고 원칙대로 대처할 때 수그러드는 특징이 있다. 차라리 매뉴얼대로만 진행하고 ‘공감 수도꼭지’를 잠그는 게 현명하다. 사람 사이에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건 서로 간에 안전지대가 된다. 기분 나쁜 영화 한 편 본 셈 치는 것이다.

기업들은 고객에게 전하는 서비스 직원의 감정상태가 매출과 직결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소비자는 왕’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친절 서비스를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친절이 사람 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건 분명하지만 친절은 마음과 마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친절한 척은 할 수 있어도 친절한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모든 고객들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다.

친절 서비스의 함정은, 감성 시스템이 말라버리면 친절한 마음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 명의 악성 고객에 잘못 걸리면 금세 에너지가 고갈되어 다른 일반 고객들을 응대하는 것조차 마른행주 쥐어짜듯 힘겨워진다. 친절 서비스를 원한다면, 직원들의 감성 시스템이 고갈되지 않도록 마음 편히 근무하게 도와주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시 되어야 한다.

감정 노동자들은 사람에 지치고 질려서 평소의 주변 사람들까지 회피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심리적 회피반응을 극복할 수 있는 ‘행동 활성화기법’ 중 하나는, 내 주위의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늘려가는 거다. 비록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게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나를 평화와 행복으로 이끄는 것도 사람에 있다.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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