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뿌리인 철학과가 대부분의 대학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이후 인문학 관련 대학과 단체들은 앞다투어 인문학 진흥을 외쳐왔다. 그 때문이었는지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까지 했다.

이제 법 시행 후 몇 년이 흘렀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 않아서일까? 이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반 시민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시민의 일상 속에서는 이 법의 정신이 피부로 잘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도 역설적이게 지역사회에서는 인문학 관련 단체들의 활동이나 인문학 강좌들이 봇물 터지듯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부산은 지역인문단체들이 연대하여 부산지역 인문연대를 결성한 지도 여러 해 되었다. 그리고 이미 조례를 제정하여 지역인문학의 진흥을 도모하고 있는 지자체도 많다. 그런데도 부산시는 인문학 진흥을 위한 조례제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부산 시의회가 지난 6월 정기회의에서 정상채 의원의 발의로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조례’를 제정, 시는 조례를 공포했지만, 시행은 아직 감감한 상태다.

법의 제정 목적은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사회적·문화적 가치가 조화를 이루고 인문정신이 경제·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함에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인간의 존엄이 바탕이 된,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자 함이다. 이런 법까지 제정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긴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이 경제·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겠다는 인식변화에 있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사회, 경제적 발전이 중심이 되면서 인간이 소외될 대로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는 사회로 전락했다. 인간에 대한 존엄 지수는 경제발전의 상승곡선과는 달리 하향곡선을 그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공동체 성원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라는,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목표에 가까이 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인정될 때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인문정신문화 진흥법은 인간 존재와 정신에 대한 근원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이 정신을 제대로 살려서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공포된 조례가 제시하고 있는 바들을 부산시는 지금 바로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조례에 의하면 부산시장은 매년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올해 당장 내년도의 예산을 반영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계획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다.

담당부서는 조례에 제시된 부산시 인문정신문화 진흥위원회를 빨리 구성해서 내년도에 펼쳐나갈 부산 인문학 진흥 프로그램과 관련된 사안들을 공론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부산은 이미 세계인문학대회를 네 차례나 치뤘다. 그러나 시민에게 남은 세계인문학대회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인문학자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고담준론만 논하고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부와 유네스코가 기획한 프로그램을 시는 펼칠 수 있는 판만 마련해준 꼴이었다. 시민 일상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지역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문학도, 인문정신문화도 지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인문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부산발 세계인문학대회까지 꿈꾸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문학자나 활동가 역량을 잘 엮어낸다면,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라는 상황이 모든 사람들의 활동과 일상을 옥죄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인문정신을 더욱 북돋우고 그 가치를 앙양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하며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인문정신을 더욱 활성화시킴으로써 답답하고 어두운 오늘의 현실을 넘어설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인간이 수많은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 인류문화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인간이 지닌 정신적 힘이었음을 지난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제정된 조례의 정신에 입각하여 부산시민의 정신적 건강의 토대를 이룰 수 있도록 부산 인문학의 진흥을 위한 부산시의 분발을 촉구한다.

부경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