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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무엇을 읽을까요 /윤주영

  • 윤주영
  •  |   입력 : 2021-07-19 19:37:58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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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스러운 취미가 없다. 취미를 묻는 설문지에 ‘독서’라고 쓰며 나의 무취미를 확인하곤 한다. 책을 읽는 것은 친구와의 수다, 밥 먹는 일과 같은 일인데 그것이 취미일까. 자기소개서를 떠올리면 왠지 어거지로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떠올라 학기 초 애들에게 나눠주는 설문에 빈칸이 많아도 이해한다.

책에서 만나는 글을 좋아한다. 글을 읽다 만나는 설레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사랑은 시간을 쓰는 일이다. 사랑해서 읽고 책의 문장들로 씨앗을 뿌리고 일상을 자라게 하고 싶다.

충렬고 교사 독서 모임의 첫 책은 ‘라틴어 수업’이었다. 라틴어의 고상한 품격과 철학이 한동일 교수의 수업법으로 더욱 빛났다. ‘라틴어 수업’은 ‘세네카의 도덕에 관한 편지에는 사람을 가르치며 배운다’는 글로 시작한다. 이 책을 읽으며 고3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고1 때 만나 작년엔 수업이 없어서, 또 코로나19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아이들이 벌써 고3이 됐다. 입학식 때 밝고, 명랑했던 얼굴이 피곤하고 수심 어린 얼굴이 되는 게 일반고의 시간이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Si vales bene est, ego valeo)’. 아름다운 이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 사진사에게 2019년 여행, 행사 사진을 부탁했다. 그렇게 받은 입학식 사진, 여행 사진을 출력해 학년실 입구에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는 제목의 작은 희망 사진전을 열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 아이들이 스쳐가며 읽는 이 짧은 글로 조금 힘이 났으면 좋겠다. 알지 못하는 전국의 고3들도….

미술실엔 온갖 종류의 화분이 있다.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 책이다. 마을 놀이터의 벤치, 골목 안의 작은 꽃, 도서관 열람실 창에서 내려다보는 나지막한 지붕과 나무, 햇살과 바람, 화분 등은 세상이 펼쳐놓은 거대한 책이다. 학교 앞 주택과 낮은 연립, 아파트 재건축으로 버려진 화분을 만난 순간, 이 애들을 알고 싶었다. 데리고 와서 특별히 영양제나 거름을 준 적 없이 햇살 좋은 창에 두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어줬을 뿐인데 잘 자란다. 나만의 비법이 있다면 출근하면 항상 식물에게 말을 건네는 것. “와! 오늘은 날이 좋네. 햇볕 많이 쪼이고 건강해지자.” 시들한 이파리가 눈에 띄면 “어디가 안 좋아? 아파? 물 줄까? 햇빛, 바람 뭐가 더 필요할까”라고 말을 건넨다.

책 읽기는 글자를 읽는 행위가 아니라 말 건네기다. 세상을 잘 보려면 세상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출근길 매일 우유 탑차가 지나간다. ‘매일 묻고 답하다’. 마음을 후려치는 글이다. 세상은 읽을 게 가득하다. 그런 날은 ‘매일 묻고 답하다’를 떠올리며 매일 묻고 답하지 않는 나를 반성한다.

‘멀고도 가까운’에서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고3이 되면 공부에만 올인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미술 시간은 ‘여러분의 쉼표’ 라며 내가 적은 글을 칠판에 붙여 읽어준다. ‘고3 미술 시간, 공부해야 하는데…. 인생에 쓸모없는 시간은 없다. 그림과 인생을 책임지는 태도를 채색하는 시간’. 단 한 명이라도 그림을 그리다 별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이가 있으리라 믿는다. 공부 때문에 무뎌진 가슴이지만, 무감각으로 하루를 보내지 않기를, 바람에 너무 나부낄 것 같아 미리 마음의 문을 닫지 않기를 바란다. 느껴야 돌봐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로 차단했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밤이 깊었다. 모두 잘 자. 추신 : “잘 자요”는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 잠드는 거래요(정혜윤의 ‘디스토피아 시대의 사랑’ 중에서).

충렬고 미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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