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하이힐은 고대 그리스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왕족이나 귀족의 필수품이었다. 도시의 길바닥이 오물과 젖은 흙으로 늘 질척였기에 옷과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었던 덧신이 지금의 하이힐로 이어졌다. 당시엔 당연히 남녀 구분이 없었다.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의 공통 복식이었던 건 치마도 마찬가지다. 스코틀랜드 남성들의 스커트인 킬트는 평소엔 고산 지역의 쌀쌀한 바람을 막고 전쟁터에선 팔에 둘둘 말아 방패처럼 활용하기에 유용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지금도 치마가 특별한 예식의 품위 있는 복식이다.
햇볕을 가리기 위한 양산은 방수 기능이 추가되어야 하는 우산보다 사용 시기가 다소 앞선다. 양산은 3500여년전 이집트, 우산은 3100여년전 중국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원시적인 모습의 양산은 막대에 나무 잎사귀를 붙이는 단순한 구조였다. 그러나 이것이 접이식으로 변하고 1단에서 2단으로, 3단으로 짧아지는 과정은 부단한 발명의 결과다. 양산이든 우산이든 옛날에는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심지어 쓰고 있는 우산이 몇겹이냐가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중국 황제는 4겹, 태국이나 미얀마에선 무려 24겹짜리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전국의 지자체에서 살수차, 그늘막, 바닥분수, 드론 예찰단, 쿨링포그(물안개), 쿨루프(지붕 차열 도장) 등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양산 쓰기도 그 중 하나다. 부산시를 비롯해 연제구 동래구 동구 등에서는 무료 대여소를 운영하면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양산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 대구는 달성공원 등 160여곳에 양심 양산을 비치했고, 제주는 양산 선물하기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양산은 여성용’이라는 선입견이 옅어져가는 기미는 이기대 수영강 온천천 등 주요 산책로마다 우산을 양산처럼 받친 남성들이 드문드문 관찰되는데서도 엿볼 수 있다.
특급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3년 전 여름, 평소 1000명 안팎이던 온열질환자가 4배 이상인 4600여명까지 치솟았고 이로 인한 사망자도 50명 가까이 속출했다. 올해는 장마 기간이 짧은데다 고온의 열돔까지 덮쳐 다시 한번 역대급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이다. 양산을 쓰면 자외선 차단은 물론이고 체감 온도가 10도 이상 떨어지는 효과가 실험으로 증명됐다. ‘여름 신사 땀띠로 죽는다’는 우스개가 있지만 타들어가는 뙤약볕 아래 남성들에게 중요한 건 체면이 아니라 실속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