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시공간적 배경이 20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다. 핵전쟁으로 환경은 완전히 파괴되고 빛 한줄기 없는 하늘에선 밤낮 없이 산성비가 내린다. 기술문명의 발달만은 눈부셔서 모든 사물이 음성을 인식하고, 자율주행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고도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복제인간이 인간에 도전한다. 하지만 감독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게 있다. 바로 휴대전화다. 주인공이 의지하는 통신수단은 여전히 공중전화다. 영화를 만들 당시 채 20년이 안돼 손바닥 만한 전화기를 갖고 다니는 시대가 올 줄 예상 못했던 셈이다.
1973년말 체신부가 새해부터 공중전화 요금을 5원에서 10원으로 100% 올리겠다는 인상안을 국회에 제출했을 때다. 거센 반대가 이어졌다. 한 국회의원은 “5원을 10원으로 올리면 5원짜리 동전에 대한 수요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물가가 배로 뛰었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했다. 결국 인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요금을 10원으로 올리는데 4년이나 더 걸렸다. 집 전화가 드물었던 시절, 서민의 공중전화 의존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휴대전화의 100% 보급으로 이용가치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공중전화가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용도는 전기 자동차나 전기 오토바이의 배터리 교환 또는 충전소다. 부산 성남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부스를 활용해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큰도로나 이면도로에 있는 부스에 밀폐 기능을 더해 범죄 안심처로 바꾸는 아이디어는 진작에 나왔다. 곳에 따라 갤러리, 서점, 무인택배 보관소, 제세동기 비치소, 은행 ATM, 공기질 측정소, 1인 사무공간 등으로 변신하고 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독일에선 SNS 이메일 등 멀티미디어형 종합 IT부스로 업그레이드 됐고, 영국에선 미니펍 동네게시판 등의 역할을 겸한다.
공중전화 부스는 삐삐 보급이 정점을 이룬 1999년 전국에 15만3000여곳이었다가 현재는 3만여곳으로 급감했다. 공중전화 1대의 월 매출이 1만 원도 안 되는 곳이 70% 가깝고, 아예 0원도 수백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악지대나 터널처럼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공간에서는 아직 공중전화가 유용한데다 노약자를 비롯한 특정 계층의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손익만 따질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공중전화 부스가 용도 폐기되어가는 도시의 흉물이 되기보다 후미진 곳을 밝히는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