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 ‘고래어(古來魚)’라고 불리는 고래를 향한 인간의 질주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고래잡이가 크게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 고래잡이를 가장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 두 작품이 이 시기에 나왔다. 영국의 풍경화가 조제프 맬러드 윌리엄 터너의 명화 ‘고래잡이 배(Whalers·1845년)’와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백경(원제 Moby Dick·1851년)’이다.
멜빌의 ‘백경’에서 고래잡이배 피쿼드 호가 마침내 거대한 흰머리 고래 ‘모비딕’을 조우하고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곳은 뜻밖에도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근해다. ‘일본 근해’가 단순히 태평양 쪽인지, 우리 동해 쪽인지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19세기 서양 문학작품에도 이 일대가 고래 서식지였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울산은 이미 선사시대 유적인 반구대암각화에서부터 고래와 인간의 조우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장생포항의 고래잡이 역사는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태평양어업㈜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지만, 수천년 전부터 이미 울산은 ‘고래의 고향’이었다. 최전성기는 1970년대 후반이었는데, 20여 척의 배가 연평균 900마리를 잡았다. 가수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발표된 때도 1975년이었다. 국내 유일의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된 것도 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생포가 ‘고래 없는 고래특구’가 될 처지여서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니 예삿일이 아니다. 해수부가 내년부터 연안에 서식하는 모든 고래를 해양보호생물로 지정키로 했기 때문이다. 고래 보호 조치라지만, 이렇게 되면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포경 금지 이후 36년 만에 고래 전면 유통 금지 시대가 된다. 장생포 상인들은 포항 상인들과 함께 ‘전국고래상인연합회’를 조직해 생존권 사수에 나설 태세다.
장생포에는 ‘고래타령’으로 불리는 노래가 있다. 노영수 시인의 시 ‘장생포 타령’에 작곡가 우덕상 씨가 곡을 붙였다. 가사를 음미해 보며 고래를 둘러싼 주민과 정부의 갈등이 슬기롭게 풀리기를 기원해 본다.
‘장생포 곤여는 오행이 골고루 / 곤궁하지 않고 정재가 있는 곳 / 앞산은 치마산 고향 마을 보살피고 / 새끼고래 수백 마리 펄떡 뛰고 춤추면 / 다칠까 돌고래 휩싸서 들이고 / 파도는 해안 따라 삥둘러 에워싸고 / 나팔소리 오색끈을 허리에 매고 / 작은 배 큰 배 고기 잡아 돌아오면 / 당산 할머님 좋아하는 곡차도 올리고 / 밤새도록 포경선 지켜주는 / 골메기 신장님’.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