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부족한 탓일까. 영화 속 등장인물에서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달랐다. 세대 격차가 극심한 상황에서 90년대생 끝자락인 필자는 이 영화를 볼 때 시대를 역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에게서 필자의 모습이 스쳤기 때문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을 때 영화관은 울음바다였다. 단언컨대 영화를 보는 모든 여성이 울었을 것이다.
모두 개인의 문제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영화 속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10대 김지영은 버스에서 의문의 남자에게 위협을 받지만 시민의 도움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난다. 문제는 그때부터인데, 김지영의 아버지는 애꿎은 김지영을 혼낸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분노할 필요가 없다.
거시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조와 낡은 인식에서 비롯된 문제다. 밤늦게 귀가하거나, 노출이 과한 옷을 입으면 범죄의 원인이 여성 탓이라고 사람들이 지적했다.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은 것이다. 이는 적절한 처벌도, 개선할 의지도 없는 사회의 문제인데 말이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 대표적인 범죄가 ‘스토킹’이다. 일회성 범죄이거나 개인의 특수한 경우라고 여긴 것이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살인과 스토킹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강조한다.
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 중 30% 이상이 스토킹을 당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도어락’에서 여자 주인공이 스토킹 증거를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경찰은 무기력하며, 사회는 외면하지만 살기 위해 피해자가 직접 범인에 맞서는 것이다.
이 영화 속 내용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보통의 일상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줬다. 각색 따위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뒷맛이 더욱더 씁쓸했다.
스토킹은 일상을 무너뜨린다. 스토킹을 당한 지인은 혼자 귀가하지 못했고, 항상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빙빙 둘러 다른 집에 들렀다가 그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본인의 집으로 가는 일이 찾았다. 문득 스치는 기분 나쁜 그 사람의 흔적에 소스라치는 순간도 많았다고 한다. 스토킹을 당하는 사람은 언젠가 들이닥칠지 모를 공포감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자취하는 지인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던 순간이 한 번씩은 있다고 한다.
1990년대 말부터 22년간 스토킹 처벌법안이 국회에서 표류했다. 22년간 정체된 법의 통과는 사회적 인식이 진보하지 못한 탓이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의 표류는 사회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 스토킹은 사회에서 개인의 문제로 치부됐고 단순한 경범죄로 스토킹 범죄가 처리됐다.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최고 8만 원의 범칙금으로 종결되는 사건이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올해부터 스토킹이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나타났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특수 범죄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살인이 가능하다는 등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올해 3월 스토킹 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러한 인식에 불을 붙인 건 내달 1일 판결을 앞두고 있는 김태현 사건이다. 스토킹에서 시작된 세 모녀 살인 사건으로 많은 이의 공분을 샀다.
이외에도 스토킹 사건은 상당하다. 텔레그램 박사방 성착취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 중 한 명도 수차례 스토킹을 했지만, 징역 1년이라는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60세 식당 주인도 수차례 스토킹을 당한 끝에 40대 남성에게 살해됐다.
숙제가 산적해 있다. 작년에 처리된 스토킹 사건은 10% 남짓이다. 경찰청이 발표한 2020년 자료로, 아찔한 수치다. 22년 동안 국회에서 멈춰있던 스토킹 처벌법이 통과됐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스토킹 사건을 국가가 얼마나 잘 다룰지가 의문이다. 스토킹은 초기 대응과 피해자 보호가 중요한 사건이다. 숱한 전문가가 대응 체계의 복잡함으로 인해 법의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20년생 김지영 영화도 나올까?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관람한 뒤 생각했다. 만약 필자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20년생 김지영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은 웃음소리로 가득하길 바란다.
개인의 문제로 김지영이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사회적 결함으로 인해 스토킹에 시달리지 않는 자유로운 20년생 김지영이기를 상상한다. 우리는 20년생 김지영을 위해 스토킹 범죄에 이목을 집중해야 한다.
부산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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