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TV화면에서 연예인-의사인 엔터테이닝 닥터들(entertaining doctor)이 수면과 수명장수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치매 심근경색 당뇨 무서운 질병들이 불면에 바짝 달라붙는다. 친절한 계몽적 클리셰 정보 앞에 겁먹은 나는 괜히 혼잣말 딴지를 건다. 한가하기도 하지. 병원은 어쩌고 저렇게 자주 방송국에 와 있을까. 의사가 있어야 할 공간이 병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기꺼이 잠의 중요성에 동의한다. 잘 자야 건강하다. 다른 층위에서 농담처럼 덧붙인다. 잠을 자야 아름답다. 잠을 자야 꿈을 꾼다.
에로스의 연인 프시케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심부름으로 지하세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에게 얻어오는 화장품이 잠이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이다. 잠이 평범한 얼굴을 강남미녀로 성형시키지는 않지만, 잘 자면 안색이 좋아진다. 환하게 꽃 피던 때가 있었을까. 젊어서 실컷 잤다. 정말 잠이 달았다. 덕분에 꿈도 많았을까. 꿈꾸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겠지만, 새로 꾸는 꿈이 불발의 희망이 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주어질까. 나이 들수록 잠이 적어지는 것은 몸 내부에 장착된 생명시스템의 레이다가 영원한 잠의 세계를 감지하기 때문 일 것이다. 깨어날 수 없는 그 세계에서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 꿈도 없이 깊이 자게 될까.
초저녁에 한숨 잤을까. 새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한밤중이다. 깨어 있는 밤이 늘어난다. 너무 일찍 자고 너무 일찍 일어나는 너무 착한 어른이가 돌아누우며 다시 잠을 청한다. 하루의 권장 수면시간을 채워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곧 포기한다. 수면제의 도움은 거부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오월, 자는 시간이 아깝다. 계속 깨어 있고 싶다. 더위도 추위도 꽃가루도 모기도 달려들지 않는 짧은 시간이 귀하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어느 한 곳 대지를 비우지 않고 빽빽하게 채우는 풀들, 허공에 길을 내며 뻗어가는 가지들과 잎들로 제 몫의 하늘의 지분을 채우고 해마다 조금씩 하늘을 넓혀가는 나무들, 찻소리 사람소리 침범하지 않은 충만한 고요가 오월의 밤에 준비되어 있다. 이 온전한 순간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나의 세대는 봄을 찬미하지 못한다. 이 시대의 비극은 봄을 편애했다. 사월 꽃의 아름다움을 기뻐하거나 노래하는 것은 나이브하게 여겨진다. 오월 찬란을 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봄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애도, 아무리 길어도 결코 길 수 없는 애도가 남아있다. 아마도 살아있는 모든 봄날, 낮의 시간은 끝나지 않은 애도에 바쳐질 것이다.
그러나 밤의 시간은 조금 덜어 써도 되지 않을까. 오월은 쇠락이 시작하는 모순의 계절이니. 몸이 오월로부터 한참 나아가 구월에 다다랐으니. 개인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카르페 디엠’이 남아 있다면, ‘욜로’를 회피한 직무유기를 조금 면할 수 있을까.
글이 되든 안 되든 쓰고 싶은 잡다한 것들이 많다. 해 보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쓰기 하나도 벅차다. 이번 생은 글쓰기 하나를 깊이 파는 일로도 모자랄 것이다. 깊이 판다고 깊이가 나오거나 깊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깊어지려고 무던히 애쓴 무력한 노력이 남을 것이다. 깊은 한숨과 더불어 끝까지 가기로 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하지 않기로 한다. 특히 잠의 여왕에게 모두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 뻗쳐오르는 찬란과 황홀에 조금이라도 몫이 있다면 온전히 누리고 싶다. 밤의 불면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더 이상 불면이 불편하지 않다. 때로 불면이 감사하다. 언제 건강 다 챙기고 살았던가. 언제 나에게 이렇게 넉넉한 시간이 있었던가. 늘 부족한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불면이 생의 리듬이 주는 시간선물이다. 불면 덕분에 시간부자다.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간다. 종일 바람 크게 불고 비 오시더니 젖은 밤의 대기가 싱그럽다.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나뭇잎들이 신비와 비밀을 간직한 밤의 세계에 귀를 열고 있다. 어둠의 탑에서 밤의 여왕이 아리아를 부르고 있는지, 투명한 비의 요정들이 검푸르고 짙은 슬픔 쪽으로 기울어지며 시린 발을 내린다. 복수를 넘어 사랑의 마술피리를 기다려도 좋을까. 밤의 산책자의 손에서 음식물 쓰레기 봉지가 덜렁거린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