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찰 벽에는 아이가 소를 찾고 길들이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묘사한 ‘십우도(十牛圖)’가 그려져 있다. 우화 속 소는 잃어버린 본성이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과학적 진리로 해석해도 그럴듯하게 읽힌다. 숲 속에서 무작정 소를 찾는 초기 여정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산만한 정보들 사이에서 발자국 같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후부터 차츰 소의 습성과 자주 다니는 길목을 알게 된다. 우거진 나무 사이를 뛰어가는 소를 목격한 날은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마침내 소를 붙잡고 길들이는 과정에는 육중한 덩치만큼 완강한 저항도 감수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과학의 시선에서 보자면 오랜 관찰과 실험 결과를 기반으로 하나의 법칙에 도달하는 ‘경험주의’ 과학연구 방법을 떠올리게 한다. ‘소’로 상징되는 관념적 여정에는 이성을 통해 선험적으로 얻는 보편원리의 ‘이론’으로부터 개별 ‘현상’의 지식을 연역하는 ‘합리주의’ 방식이 더 적합해 보이지만 ‘십우도’의 첫 번째 그림은 ‘경험주의’ 방식처럼 아이에게 일단 숲 속으로 들어가길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 모형은 산만한 실험 결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지만 때론 잘못된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 모두 태양계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는 목성의 위성, 금성의 겉보기 모양 변화, 태양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별의 미세한 위치 변화 같은 사소해 보이는 관측 결과 속에 숨겨져 있었다. 10여 년 받아온 학부실험리포트 ‘검토’란에는 늘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 “실험장치가 정교하지 못해 이론과 차이가 발생했다. 장치가 좋으면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과학에 대한 오해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실험과목을 단순히 교과서에서 배운 이론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론은 정답이고 정답과 다른 실험 결과는 불편한 것이다. 이런 불편함을 애꿎은 장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은 ‘이론’이라는 고귀한 이데아가 ‘실험’이라는 현실에 오염되지 않게 하려는 신념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이론과 어긋난 실험 결과는 처음부터 관심에서 제외되고 실험수업은 뻔한 결과를 확인하는 지루한 시간이 된다. 하지만 역사 속 많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사유와 논리에만 빠져 관찰을 소홀히 여기거나 기존 이론과 다른 실험 결과를 오차 속에 묻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위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설렘과 좌절 사이를 오가며 숲 속을 헤맨 아이에게 소는 결코 숲과 분리된 경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의 실험 경험 또한 요약된 법칙 하나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소를 품은 숲처럼 실험데이터 속에는 원형의 진리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어쩌면 현재의 이론이 미처 알지 못한 또 다른 진리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가령 ‘평면 위를 구르는 공’이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운동도 실험 테이블 위에서 구현하는 순간 여러 마리의 소들이 숨겨진 것 같은 다채로운 물리현상의 숲을 만나게 된다. 공은 바닥을 구르며 작은 소리를 낸다. 바닥과의 마찰로 발생한 전하는 주변 먼지들을 당기고, 공기는 공과 바닥의 틈을 파고들며 요동치기 시작한다. 거대한 지구의 회전 역시 작은 공의 움직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테이블은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을지 모른다. 우화 속 아이 같이 무지했을 과거의 과학자들은 이렇게 다채로운 ‘현상’의 숲에서 어떻게 ‘법칙’이라는 소를 찾아 길들일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들이 사용한 실험 장치는 현재의 학생들이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원시적인 것들이었다.
교과서는 핵심 과학이론을 잘 정리해 두고 있지만 숲의 경험을 느끼게 할 수 없다. 반면 실험수업은 숲 속의 소를 찾아가는 거친 여정을 재현시킨다. 소의 위치를 정해두고 박제된 소를 끌고 오는 작업이 아니다. 진리를 만나는 순간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살아있는 소와의 만남처럼 언제나 강렬하다. 그런 살아있는 경험을 위해서는 먼저 ‘자연’이라는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