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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칼럼] 해 뜨는 아침, 겨울 산의 속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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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2-31 19:51:48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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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야 우리는 비로소 산을 본다. 꽃들로 화사한 봄의 산이든, 녹음 짙은 여름 산이든, 단풍으로 치장한 가을 산이든 우리는 ‘산의 이름으로’ 꽃과 나무와 숲을 보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어야 우리는 산 그 자체를 본다. 억만 장 나뭇잎의 무게를 덜어내고 창살처럼 서 있는 나무들, 그 사이사이로 속살을 드러낸 산을 본다. 소실의 계절에 자연이 허가한 생명의 근원 같은 존재, 숲이 있던 곳에 산이 있다.

해 뜨는 아침, 강추위에 파랗게 질린 하늘을 기대고 서 있는 나체의 겨울 산은 숭엄하기까지 하다. 칼바람이 산기슭과 능선을 휘젓고 다니며 오만한 포효를 해보아도 겨울 산의 의연함을 범하지는 못한다. 그 어느 것으로도 치장하지 않고 속살을 드러낸 산은 자기 존재에 대해 자신만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연의 근원, 곧 본질로 돌아간 세상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자연의 시계는 삶의 진실을 계시한다. 사계절 가운데 한 겨울에 시간의 분기점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 모른다. 우리는 겨울에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는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의 동물인 인간에겐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성찰은 속살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산은 강추위와 칼바람을 견디며 그 모범을 보이고 있다. 겨울의 사유는 가을의 사색보다 냉혹하다. 하지만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일지 모른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일상생활을 정치·경제·사회·문화라는 분야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나열된 순서가 중요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속살을 드러내는 성찰이라는 점에서는 문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문화가 형성해놓은 종합 플랫폼 위에 살고 있다. 아니 디지털 문화가 우리 삶의 플랫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이를 활용하며 즐기는 방식은 하나의 도구, 즉 스마트폰이라는 ‘전체주의적 기기’로 획일화되어 있다. 모든 것을 제어하는 도구를 손안에 쥐고 있을 때, 우리의 감각 활동은 극대화된다. 쉴 새가 없는 것이다.

20세기말 자본주의가 고도화 되었을 때 인류의 존재적 고민은 ‘소유인가 존재인가’라는 물음으로 대변되었다. 나는 당시 디지털 문화의 본격적인 도래와 함께 ‘활동인가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더해질지 모른다고 예견했다.

안타깝게도 그 예견은 오늘날 맞아 들어가고 있다. 인간 감각의 과도한 활동이 중독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 과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언이 아닐 것이기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 ‘활동’을 덜어내야 한다. 절제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

문화는 사회의 개념과 밀접하다. 디지털 미디어는 당연히 사회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간단하고 미시적인 일상의 예를 하나 들어본다. 메신저든 카카오톡이든 일반 문자든 문자 보내기와 온라인 업로드는 오늘날 가장 빈도 높은 소통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엔 상호성을 줄이고 일방성을 강화하는 특성 또한 있다. 전화 같은 동시적 상호소통이 갖는 미묘함과 때론 껄끄러움을 내 쪽에서 시차적으로 사전 통제하려는 ‘나의 일방성’이 잠재하기 때문이다.

문자 소통은 사실 상호적 사회관계의 본질을 약화시킨다. 동시에 정직성의 수위 또한 낮춘다. 뭐 정직하지 못하게 된다고? 놀랄 것 없다. 상대와 대면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며 소통할 때보다 더욱 ‘내 입장을 구성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때 정직성의 수위를 조정하게 된다. 여기에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절제와 균형을 잡는 일이 필요하다. 개인의 미시적 활동은 사회의 거시적 문화변동에 점진적 나비효과를 가져온다. ‘진실의 위장과 왜곡’에 익숙해지는 사회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경제야말로 본질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고대로부터 경제의 본질은 ‘아껴 쓰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구어로 경제(economy)라는 말이 ‘가사(家事)’에서 유래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도성장이 가져온 풍요의 모순과 환경 파괴를 진지하게 성찰하며 이제 불가피해 보이는 저성장 시대에 맞는 삶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의 속살은 무엇인가. 현대 민주주의에서 그 답은 나와 있다. ‘민(民)’, 곧 나라 사람들이다. 이에 무엇을 더 붙이겠는가. 직업으로서 정치인들은 국민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 이상으로 진정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해 뜨는 아침, 겨울 산의 능선에는 나목들이 수지침처럼 꽂혀 있다. 사계가 다 가도록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었던 산에게 치유의 침을 놓고 있는 듯하다. 봄이 오면 산은 서서히 자신을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꽃과 나무와 숲의 향연을 위한 터전을 마련해주고 자연의 비밀을 오롯이 품은 채 자신을 숨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하리라. 황량한 계절에 우리 삶의 속살을 성찰하게 해주었던 저 겨울 산을.

철학자·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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