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놀만 한 거리가 없었던 대학 시절에 대학생들이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오락장은 당구장이었다. 볼링장도 있었지만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 전 당시 서울 기준으로 볼링 2게임을 즐기려면 5000원 정도가 필요했다. 아르바이트 거리도 별로 없던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대부분의 남학생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의 손에 이끌려 그보다 훨씬 저렴한 당구장 출입을 시작하게 됐다. 담배 연기 자욱한 당구장에서 입에 담배를 물고 인상 쓰며 당구공을 노려보던 그때 그 얼굴들이 눈에 선하다.

당구 경기의 여러 방식 중 우리나라에서는 흰 공 두 개를 각각 한 개씩 나눠 갖고 정해진 횟수만큼 빨간 공 두 개를 맞추는 4구 경기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자신의 실력에 맞게 정해진 횟수를 다 쳐낸 후에는 공보다 당구대 벽을 먼저 맞추는, 흔히 쿠션이라고 말하는 뱅크샷을 먼저 성공해야 경기를 끝내고 이길 수 있다. 뱅크샷을 치기 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횟수 중 마지막 남은 한 번을 맞추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늘 어려웠다. 그래서 마지막 한 번은 일단 남겨놓는 것이 당구인의 매너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뭔가를 끝낸다는 것은 시원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쉬움을 갖게 하는 일임에 모두가 공감하는 듯하다.

그냥 하루가 지나가는 것뿐인데 우리는 새로운 각오로 한해 시작하기를 즐기며 여러 가지 계획 수립에 골몰한다. 필자는 올해를 시작하면서 강의 하는 한 과목의 교재를 바꾸려 했다.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가르치는 교수 입장에서 교재를 바꾸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칠판에 판서하며 강의를 했기 때문에 교재 바꾸는 것이 비교적 쉬웠지만 지금은 강의 자료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미리 제공해야 하는데 시청각 기능에 대한 요구가 높고, 제작 과정에서 인터넷을 통해 구한 자료를 잘못 사용하면 저작권 침해 시비에 휘말리기 때문에 강의 자료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학기 교수계획표에 새로운 교재를 기입하고 몇 년간 사용하던 교재를 바꾸려는 과감한 도전을 했으나 아뿔싸, 코로나19는 1학기 내내 온라인으로 강의를 제공하게 만들었고, 단순히 프레젠테이션 자료만이 아니라 강의 영상까지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바꾸려던 교재는 원래대로 돌려놓고 기존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힘겹게 영상을 만들며 1년을 보내고 말았다.

2020년의 끝을 하루 앞둔 오늘, 만감이 교차한다. 연도에 20이라는 숫자가 두 번 연달아 나오는 특이한 해라 내심 올해의 시작은 여느 해보다도 산뜻하게 출발했으나 코로나19는 전 세계인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한 전염성 질병이 어찌 이번 코로나19 뿐일까. 최근에는 거의 2~3년 간격으로 새로운 전염성 질병이 등장하여 모두가 괴로운 경험을 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다양한 전염성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어렵지 않은 예측을 할 수 있고 코로나19로 고통받은 2020년을 보내고 2021년을 맞으면서 뭔가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 중 얼핏 생각나는 것을 몇 개 말해본다면 첫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이 절대적이고 유일하다’고 고집해서는 안 되고 다소 유연한 생각과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둘째,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늘 준비하고 점검하는 자세 또한 필요할 것 같다. 셋째, 전통적으로 정으로 뭉쳐졌던 우리 사회의 각종 관습과 관행들이 이젠 어느 정도의 거리가 유지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음식을 공유해왔던 식문화라든가 접촉을 해야만 정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2020년과 영원한 이별을 하루 앞둔 오늘, 수십 년 전 친구들과 당구를 즐기며 마지막 남은 한 번을 못 쳐 뱅크샷으로 들어가지 못하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괴로운 삶의 연속이더라도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일이고, 다만 새롭게 만나는 2021년은 2020년의 어두움을 털어버리고 비록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겠지만 우리 표정만이라도 코로나19 이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길 기대해본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