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슈퍼컨테이너선 ‘HMM 알헤시라스’호(2만4000 TEU 급)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했습니다.” 올 여름 이 소식을 접한 순간 까닭 모를 뿌듯함에 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메이드 인 부울경’인 이 배가 부산항에서 유럽을 향해 첫 항해에 나선 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비록 내 배(船)는 아니었지만, 배(腹)가 저절로 불러왔다. 그러다 문득 든 의문 하나. 수많은 해협을 거쳤을텐데 어째서 유독 수에즈운하 통과가 주요 뉴스로 전해지는 것인가?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에즈운하가 차지하는 세계 항로 개척사의 ‘혁명적’ 가치 때문이지 싶다. 1869년 정식 개통된 수에즈운하는 로테르담 함부르크 등 서유럽 항만과 아시아의 물적 인적 교류에 비약적 도약을 가져온 인류의 걸작이다. 희망봉을 돌지 않고 지중해와 인도양을 직통 연결함으로써 항로 거리를 5600㎞나 단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BC 13세기 고대 이집트 왕조 때부터 나일강 하류와 홍해 연결 계획이 있었으며, 3000년 넘는 끈질긴 도전이 일군 성과라는 것을 알게되면 더 크게 놀라게 된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인 헤로도투스(BC 484?~430?)의 명저 ‘역사’의 기록들이 흥미롭다.
BC 6세기 이집트 네코 2세 때 공사 인부가 12만 명이나 희생됐으나 실패했다. 피라미드 등 당대 최고 수준의 토목기술을 자랑하던 이집트의 도전은 비록 좌절됐지만, 의미는 있는 실패였다. BC 5세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대왕이 이집트인들의 기초 위에서 마침내 운하 개통에 성공했다. 물길의 너비는 갤리선 교행이 가능할 정도였다. 이후 정세에 따라 이 물길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에 와서야 현대식 운하로 탄생했고 확장 및 개·보수를 거쳐 지금은 슈퍼컨테이너선과 항공모함까지 지나는 ‘세기의 관문’이 됐다. 세계를 바꾼 대역사(大役事)다.
다소 장황하게 수에즈운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가시권에 들어온 가덕신공항 때문이다. 가덕신공항 건설이 부산의 미래에 끼칠 영향력은 수에즈운하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과 맞먹는 ‘혁명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수에즈운하를 통해 지구촌은 더욱 가까워졌고 세계사의 물줄기가 틀어졌듯이, 가덕신공항 건설을 통해 부산과 세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도시의 미래도 급변할 것이다.
‘두근 두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부산 사람으로 살면서 이렇게까지 가슴 벅차 올랐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수 십 년간 움츠렸던 도시 부산이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가덕도에서 발견한 ‘희망의 등대’, 그 불빛을 살리기 위한 민관의 협력과 노력이 마침내 싹을 틔웠다. 부산의 공직자는 물론이고 재계와 학계, 사회단체, 나아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지혜와 역량이 응축된 결과다. 속도감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마련은 당연하다. 이제 가덕신공항을 통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냥 날아오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세계도시, 동북아 관문도시에 걸맞은 유무형의 킬러 콘텐츠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세계인들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도시에 그치지 않고 아예 살고 싶어하는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그 꿈을 향한 민관의 지혜와 협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태종대 앞 바다 파도처럼 거세게 넘실대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에서처럼 모든 문제를 기탄 없이 논의하고, 합의를 모아 실천하는 ‘열린’ 도시여야 한다.
예를 들어 적잖은 찬반 논란에 휩싸여 있는 ‘해운대~이기대 해상케이블카’와 같은 민감한 문제까지도 부산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뿐만 아니라 가덕신공항과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한 사안이라면 뭐든지 열린 공간에 펼쳐내야 한다. 한-일 해저터널 건설, 글로벌 육·해·공 3각 물류기지 완성의 마지막 퍼즐인 부산발 트랜스 유라시아 철로 및 고속도로의 북한 통과 문제 논의까지 필요한 시점이다. 부산의 역사는 가덕 이전과 이후 시대로 나뉠 것이다. 새로운 시대 부산의 리더는 오로지 지역의 미래 만을 바라보고 아이디어를 모아내야 한다. 또 시민과 소통하고 과감히 도전하며 행동하는, ‘열린’ 리더여야 한다. 이 점이야 말로 오늘 예비후보 등록과 함께 막을 올린 120일 간의 부산시장 보궐선거 레이스를 지켜볼 관전 포인트다. 시민은 이런 자질을 가진 자와 정파적 이익 및 권력욕에만 쏠린 자를 가려낼 ‘매의 눈’을 갖춰야 한다. 레이스에 뛰어든 ‘건각’들에겐 AD 1세기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에서 복지부동하는 속주의 총독을 평가하며 남긴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게으른 무위정책. 그러면서도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 21세기 부산 시민이 던지는 ‘옐로카드’이다.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