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을 뭉쳐놓은 것 같아.”

흑갈색 모자를 쓴 내 얼굴을 본 딸의 솔직한 품평이다. 모자가 어울리지 않는 줄 알지만 모처럼 용기를 낸 연출인데 기가 팍 꺾인다. 문고리를 잡고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뻗디딘 나와는 달리, 딸은 한술 더 떠서 토막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물일어설을 들먹이며 자신의 표현이 적확했노라며 너스레를 피운다.

슬그머니 모자를 내려놓고 예정대로 이기대 둘레길을 걷는다. 매운 갯바람이 민낯을 스치지만 감촉은 오히려 부드럽다. 진흙 얼굴이니 흙이 햇살을 받고 바람을 맞는 것은 당연지사. 인간과 흙의 역사는 태초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 인간인 아담도 히브리어로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출발했고, 흙덩이로 만든 인형에게 숨을 불어 넣어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든 신화가 동서양 곳곳에 등장하며, 우리나라 제주섬도 천상의 설문대할망이 치마폭 흙을 내려놓은 땅이라는 설화가 구전되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은 모두 진흙이라는 허물을 쓰고 살아갈 뿐. 만약 태어날 때 살갗이 얼굴 뼈 위에 그대로 굳는다면 평생 얼굴상이 바뀌지 않겠지만, 도량 넓은 조물주께서는 감사하게도 세월 따라 모양이 변하는 진흙 탈을 덮어 주셨다. 미추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표정이나 인상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쯤 누구나 알고 있는 법. 그런 까닭에 사람은 각기 제 얼굴 만들기에 고군분투한다. 원시인들이 진흙을 덮어 얼굴에 치장했던 것도, 현대인들이 화장과 성형으로 안면을 가리고 바꾸는 것도 어쩌면 쉽게 마음을 들키지 않겠다는 속내에서 비롯된 일은 아닐는지.

삶이란 진흙 얼굴 하나씩 달고 흙바닥에 뿌리를 내렸다가 진흙 무덤 속으로 되돌아가는 일. 어차피 인간이라면 진흙탕 길에 몇 번 나뒹굴기도 하겠지만 진흙이라고 모두 질척거리고 지저분하기만 할까. 하찮은 돌덩이가 부처님을 탄생시키고 태풍에 쓰러진 나무도 서까래가 되어 지붕을 받치듯 풀 한 포기도 물기 머금은 흙을 품어야 기운을 위로 올릴 수 있다. 개울 진흙이 미꾸라지도 살게 하고 개펄 웅덩이는 쏙과 낙지와 바지락을 키운다.

그것뿐인가. 수억 년 전의 물결과 발자국과 빗방울까지 화석을 만들고 백악기 공룡알을 모셔놓은 일등공신도 진흙이 아닌가. 흙구덩이가 백제 금동대향로를 지켜내었고 굽다리접시와 주령구와 돌벼루 등 신라 유물을 천년이나 품고 있었던 것도 진흙 연못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천연 머드가 피부에 좋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며 과학자들은 진흙 속 미생물로 전기도 생산한다.

무엇보다도 진흙의 놀라운 변신은 견고한 그릇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아오이라는 일본 아가씨가 있다. 그녀의 외삼촌이 조선 도공 15대 심수관이다. 심수관가는 선대가 정유재란 때 끌려간 이래 사백여 년 세월 동안 가마에 불을 지피며 한국의 성씨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그녀 소개로 가고시마 도요에 갔었는데 최고의 명성답게 도자기 값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나는 몇억짜리 막사발도 한 덩이의 진흙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더 경이로웠다.

흙바람이 불어온다. 흙의 소리를 듣는 풀들과 나무들 곁에 앉아보니 세상에 흙 아닌 것이 없다. 발밑의 상수리 열매도 갯쑥부쟁이 꽃대도 배낭에 든 한 권의 책도 사람도 지구도 이미 흙에서 태어났거나 머잖아 흙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였다. 이왕지사 흙이 될 운명이라면 좀 더 보드랍고 따뜻한 흙이 되고 싶다. 흙에 공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농사짓는 지인 중에 실수를 할 때마다 그는 흙에 부끄럽다고 했다. 흙처럼 낮아지라는 말이 더욱 신성하게 와닿는다.

그러고 보니 진흙 얼굴이라는 말, 그것이 내가 듣는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손거울을 꺼내 들고 찬찬히 진흙 얼굴을 읽는다. 빗금진 토기 같은 몰골이지만 흙에 덮여 세월을 견디다 보면 봄기운 담은 푸른 날도 찾아오겠지. 눈을 가늘게 뜨고 두 뺨을 들어 올려 입술을 둥글게 구부린다. 진흙으로 뭉쳐진 인간 하나가 말랑한 웃음을 짓고 있다.

문학평론가·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