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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석화(石化)하지 않은 ‘지껄임’ 새해엔 가능하길 /유성환

이집트 분묘 벽에 남은 귀족 자화자찬 치적 옆 보통 사람들의 ‘지껄임’…일상 소중함 느끼게 해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1-25 19:55:07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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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집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상형문자의 아름다움과 언어구조의 정밀함 때문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나 고대 중국의 갑골문도 나름의 미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고대 이집트의 텍스트에서 동물과 식물, 사람과 사물이 한데 어우러져 문장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문자로 구현된 생태계를 보는듯한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에는 이런 그림문자의 조화로 구성된 문장들이 신전이나 분묘 벽면 가득히 새겨지거나, 비문이나 파피루스에 촘촘히 표기된 모습에 또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중요한 내용이었기에 저리도 빼곡히 써넣어야 했을까?” 필자가 느꼈던 이런 경이로움은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집트에 가보았거나 박물관에서 이집트 유물을 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실 것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전공한 학자로서 필자는 이들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특별한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이집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전 벽면에 새겨진 문장들은 대개 신을 찬양하거나 신전을 건립한 왕의 치적을 기록한 것이고 분묘나 비석에 새겨진 문장들은 그것을 건립하거나 제작한 인물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파피루스에 쓰인 텍스트는 그 용도에 따라 공문서, 보고서, 각종 서신에서 수학이나 의학과 같은 주제를 다룬 실용서, 서사문학 작품, 현자들의 교훈서 그리고 소유자의 영생과 부활을 돕는 주문(呪文)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자 자체가 신성시 되었으며 문자를 새기는데 상당한 노력과 비용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텍스트로 작성하여 남길 가치가 있는, 특히 벽면이나 비석 같이 딱딱한 돌에 새겨진 문구들의 문체는 함께 새겨진 부조들만큼이나 경직되고 형식적이었으며 그 내용과 형식은 - 마치 한때 널리 사용되던 전보(電報)의 통지문처럼 - 획일화, 정형화되어 있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귀족들이 죽은 뒤에도 영생을 누리기 위해 건립한 분묘의 벽면에는 주인의 형상과 함께 자전적 ‘일대기’가 새겨져 있는데, 대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총애와 동료의 존경, 그리고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배고픈 자에게는 빵을 주었고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주었으며 배가 없는 자를 건네주었고 아들이 없는 자를 묻어 주었다”는 공통된 선행을 행한 의인(義人)으로 대상을 묘사했다. 이들 내용이 얼마나 천편일률적인지 이런 문구들을 모아 패턴별로 분류한 학술서가 있을 정도다. (이런 내용을 부지런하게 수집하고 정리하여 책으로 묶어내는 사람들은 독일 학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에도 작은 반전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 반전은 분묘를 찬찬히 살펴보아야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귀족 분묘의 벽면에는 분묘 주인의 근엄한 모습뿐만 아니라 영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장면에 새겨진 문장들 중에는 귀족들의 뻔한 자화자찬과는 확연히 다른, 땀 냄새 나는 보통 사람들의 애환과 해학이 담긴 파격적인 ‘지껄임’들이 들어가 있어 읽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일꾼 두 명이 소 젖을 짜는 장면에 새겨진, “빨리 해, 주인님 오시기 전에”라는 문장은 일견 목가적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을 한 순간에 우유를 횡령하는 귀여운 범죄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농부들이 밭일을 하는 장면에서는 한 농부가, “나는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거야”라고 다짐하는데 이에 다른 농부가 “이 친구야, 서둘러 일이나 하시지. 그래야 제 시간에 집에 갈 거 아냐” 하고 빈정거리는 문구가, 숯불에 거위를 굽고 있는 사람을 묘사한 장면에는, “내가 태곳적부터 굽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질긴) 거위는 처음 본다”는 사내의 불평 섞인 독백이 읽는 이를 웃음 짓게 만든다. 목부들이 소떼를 이끌고 여울을 건너는 장면에는 뒤에서 소를 모는 목부 한 명이 동료를 향해, “이 똥 같은 놈아, 소들을 앞으로 몰아!”라고 소리친다. 모두 이미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중시하던 이집트 예술에서 분묘 주인의 허락이 없다면 결코 새겨질 수 없는 장면들이다. 귀족들도 자신들의 고상한 어법과는 다른, 삶의 현장에서의 이런 ‘지껄임’들이 그리 싫지는 않았나보다.

입에 재갈이 물린 듯 온 나라가 답답한 한 해였다. 삶의 현장은 더 삭막해졌고 사람들 사이의 접촉은 더욱 줄어들었다. 같은 공간에서 호흡과 담소를 나누던 당연한 일상이 아득하고 소중하게 느껴진 것은 필자만이 아니리라. 분묘 여기저기에 보석처럼 새겨진 저잣거리의 보통 이집트인들을 떠올리며 내년에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주위 동료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과 마음껏 호흡하고 지껄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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