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사가 부산에서는 흔치 않은 직종이라 주변에서 배급 일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이다. 단골 질문 중 하나가 모든 인터뷰의 기본이겠지만 배급하면서 가장 재밌을 때가 언제냐는 것이다. 그때마다 관객이 영화를 잘 봐줄 때나 홍보가 잘 됐을 때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적절한 여러 응답이 있었지만, 한 번도 ‘나에게 흡족한’ 대답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나의 행복은 현실적인데, 그걸 말하는 게 조금은 겸연쩍기도 하고 약간은 비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단연코 배급사에서 일하며 가장 행복한 때는 감독님들에게 수익금을 정산해줄 때이다.
이것이 얼마나 미미한 행복인지 알려면 ‘작은영화’의 현실을 더욱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개봉되어 티켓이 팔리면 그 수익을 극장과 배급사가 절반씩 나눠 가진다. 그리고 작은영화에 투자사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배급사는 각 극장에서 받은 티켓 수익을 제작사(감독님)와 다시 나눈다. 문제는 씨네소파가 배급했던 작은영화들은 지역극장의 개봉 관객이 50명도 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극장 한 곳의 수익금이 ‘몇 천 원’일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때 가장 기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천할지라도, 극장에서 분배받은 돈을 감독님과 나눌 때 배급인으로서 가장 행복하다.
처음 씨네소파를 시작할 때 나는 문화예술판의 ‘대의’라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단지 나 자신과 친구들이 제발 좀 쾌적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회사의 이름이 ‘부귀영화’가 될 뻔했다. 회사명이 씨네소파가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때부터 줄곧 대의나 기성세대와 온 힘을 다해서 멀어지려고 노력했었다. 로컬영화의 교두보라든지 건강한 문화생태계 구축 따위의 출사표가 없는 것이 출사표였다.
흔히 사람들이 배급사 대표인 내게 하는 기대와는 달리 나는 영화가 너무 좋지 않다. 나는 돈 줄 때가 너무 좋다. 누군가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배급하는 영화가 대박이 나거나 작은영화를 누구나 즐기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활동으로 지금 여기 사는 존재들이 영화(榮華)로왔으면 한다. 그러고 보면 대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한참 잘못 설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씨네소파의 비전 중 하나는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살아남고 대안을 제시한다’ 는 것인데, 그에 따라 우리의 가치는 자본사회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이념’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옛날 책을 뒤적여보다가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디고연구소에서 가라타니 고진과 진행한 인터뷰를 엮어 만든 감동적인 책 ‘가능성의 중심’을 보면, 미래의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는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이념, 규제적 이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기에 타협해도 좋습니다만, 이념만큼은 제대로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념을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말씀드리자면 ‘높은 이념’을 가지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쩐지 나는 올 한해를 꼬박, 내가 단절했던 대의나 기성세대에 시비를 걸고 싶었다. 살기 힘들어서 싸움꾼이 된 것은 아니고, 그래야만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규제적 이념이라는 것이 없었던 적이 없었고 그것이야말로 지난날 나를 간신히 지탱해줬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의에 반기를 들며 설정했던 나의 현실이,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매개로 활동하면서 세속적으로 쾌적한 생활을 갈망하는 것이, 사실은 이상이라고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살아가기 위해서 ‘높은 이념’과 화해하고 싶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지표로서 존재하고, 그것을 향해 서서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념입니다(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71쪽).”
자, 이제 높은 이념을 가져볼까.
씨네소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