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귀속주의)이 아닌 능력(능력주의)에 따라 성적, 입학, 직업이 결정되는 공교육을 탄생시킨 국민국가의 근대교육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연구물이 속속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지능(I)+노력(E)=능력(M)’이라는 도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능력에 따른 차별적 보상을 하는 인정 체제인 ‘능력주의(meritocracy)’ 이데올로기가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다.
피시킨은 ‘병목사회’(2016)에서 우리나라의 수능 시험과 같은 ‘단 한 번의 거대한 시험(one big test)’이 판돈이 지나치게 높은 ‘고-부담 시험’이라고 질타한다.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미래를 결정짓는 거대한 시험사회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계층 상승의 유일한 관문인 ‘병목(bottleneck)’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려고 피 말리는 경쟁을 하도록 한다. 청소년들 모두가 ‘단 한 번만’ 운행되는 만원 열차에 서로 타려고 한다. 그것 또한 단순한 일회성 경주가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세대 간 릴레이 경주’를 거치는 무한 경쟁의 결정판이다.
영어 유치원 입학, 자립형 사립고와 외고 입학, 일류대 입학, 대기업 취직 등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인생의 경로에서 심각한 ‘병목’에 맞닥뜨린다. 반복해서 암기한 것을 테스트하는 시험체제이니 아이들의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멀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도 적다.
세습 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능력주의를 억누르고 ‘비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기에 그렇다. 이런 비능력적 요인들은 능력을 통해 잠재력을 발휘하는 사람의 노력을 좌절시킨다. 개인적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맥이 없으면 성공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을 맥나미와 주니어는 ‘능력주의는 허구다’(2015)에서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마코비츠 또한 ‘엘리트 세습’(2020)에서 능력주의는 명문대, 로스쿨, 금융가, IT산업을 ‘엘리트끼리 야망을 겨루는 격전지’로 만들고 대다수의 사람을 사회의 주변부로 몰아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엘리트들은 과연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특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생 치열하게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좋은 일자리를 얻은 뒤에도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입증하느라 탈진 상태와 집단 불안에 빠져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왜곡된 능력주의의 함정을 넘어 자신의 능력/잠재력이 진정으로 존중되는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가? 궁극적 해결책은 지나치게 양극화된 노동시장과 경직된 대학서열체제, 19세에 시험 하나로 사람의 역량을 재단해버리는, 명문대 중심의 학벌주의 사회체제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다.
사회학자 김종영 교수는 피시킨 교수의 병목사회론보다 더 발전된 제안을 한다. 그는 선진국 중 한국만이 유일하게 입시 지옥임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대학체제는 크게 유럽식의 평준화 모델, 미국식의 다원화 모델, 그리고 한국식의 독점화 모델로 나뉠 수 있다. 즉 서울 중심의 공간병목, 명문대 중심의 대학병목, 상대평가로 인한 시험병목, 사교육비에 의존한 계급병목이 모두 합쳐져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악의 대학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질타한다. 이 체제는 공평하지도 않고 지극히 비효율적이며 경쟁력도 없다는 것이다.
유럽 고등학생들은 어떤 도로(대학)로 가도 상관없고, 미국 고등학생들은 다양한 도로(100여 개의 명문대학)로 갈 수 있고, 한국 고등학생들은 아주 좁은 도로(SKY 대학)로 가야 한다.
한국 대학체제처럼 피라미드식 독점 모델에서 유럽식의 ‘평준화 모델’로 바로 전환하기는 불가능하기에 미국식의 ‘다원화 모델’로 전환한 다음 평준화 체제에 진입하는 게 현실적이다. 이런 방안은 대학서열화 체제가 우리나라 교육의 왜곡을 가져오는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세워진 피라미드 구조로 짜여진 사회의 물질적·문화적 부정의를 줄이는, 병목 지대를 대폭 완화하는 정책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특권학교 폐지, 수능의 대학입학자격 고사화, 대학 등록금 무상화, 직업에 따른 임금격차 해소 등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는 다원적 경로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부산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