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6일 밤 K리그 올스타팀과 이탈리아 유벤투스의 친선경기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분노로 가득 찼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덥고 습한 날씨에도 6만 관중이 몰렸지만 그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티켓 구입에만 수십만 원을 쓴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국내 예능프로그램에서 ‘우리형’이나 ‘날두형’으로 불리던 그가 ‘날강두’로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제는 호날두 팬임을 자처하면 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지경이다.
어딘가 한 분야에 푹 빠져있는 사람을 ‘덕후’라고 한다. 집에 콕 박혀 취미에 몰두한다는 의미로 일본어 오타쿠의 한국식 표현이라는 설명도 있다. ‘입덕’은 덕후 활동을 시작한다, 반대로 ‘탈덕’은 덕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아이돌 세계에서는 탈덕이 가장 경계 대상이다. 이들이 변심하면 처음부터 안티였던 사람보다 훨씬 더 무서운 안티가 되기 때문이다. 기대가 실망으로 애정이 증오로 바뀌면 원래 데면데면 했던 사이보다 더 나쁜 관계가 되는 게 세상 인심이다.
정치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트럼프를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올린 건 쇠락한 북부 공업지대(러스트벨트)였지만, 이번 대선에서 그에게 패배의 결정타를 안긴 곳도 이곳이다. 코로나19 방역 무능과 흑인 사망사건이 이어지면서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등 러스트벨트의 핵심 주들이 일제히 민주당의 푸른 물결로 돌아섰다. 김경수 경남지사와 악연이 된 ‘드루킹’ 김동원 씨도 원래는 친노 친문 성향의 외곽 지원단체를 이끌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난 대선 과정에서 댓글 작업을 한 대가로 공직을 요구하다 사이가 틀어지자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을 두고 악성 댓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경찰에 수사 의뢰해 주동자를 검거하고 보니 바로 그 일당이었다. 드루킹과 측근들의 옥중 진술 때문에 항소심에서도 징역형을 선고받은 김 지사를 비롯해 여권의 인사 여러명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 탈덕한 덕후의 앙심에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다.
‘노사모’를 시작으로 ‘박사모’ ‘달빛기사단’ 등 특정 정치인 지지를 표방하는 단체는 오늘날 한국 정치를 설명하는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자신을 대가없이 도와주는 지지층보다 소중한 자산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 속에 모리배도 스며들기 마련이다. 결국은 정치인들 스스로 정도를 걷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게 틀어질 때 어제의 동지가 철천지 원수로 뒤바뀌는 모습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