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책을 보다가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일화를 읽게 되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성녀가 “하느님 어째서 세상에는 이렇게 고통이 많나요?”라고 물어보았다. 하느님께서 “그것이 내가 내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이고, 그 고통을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물론 테레사 성녀는 성녀답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왜 주님이 그렇게 친구가 적은지 알만 하군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종교마다 저마다의 답을 주지만, 사실 그렇게 쉽게 납득되는 답은 없는 듯 하다. 특히 선천적으로 아프게 태어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신이란 존재는 없든지, 있어도 상당히 고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11살짜리 남자아이를 수술하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신장에 문제가 있어 고생을 하다가 결국 복막투석을 하는 아이였는데, 마침 소아 뇌사자가 있어 신장을 기증받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소아 뇌사자의 경우 소아 장기 기증 대기자에게 우선적으로 이식받을 기회가 제공되도록 시스템이 바뀌었는데,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조금 작을 뿐, 그동안 신장이식을 했던 아이들처럼 동반된 기형이 없었기 때문에 지능도 정상이었고 말도 잘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이가 참 침착하고 착하다는 생각을 했다.
뇌사자 신장이식에서는 흔한 일인데, 신장이식 수술은 잘 되었지만, 이식 받은 신장의 기능이 바로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통 소아에서는 그런 경우는 드문데, 이 아이의 경우는 그런 경우에 해당되어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하며 일주일 정도 지내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이전과 달리 부모와의 면회마저도 제한되는 상황에서 아이가 답답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안쓰러웠다. 정신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한 노인은 중환자실에 오래 있으면 ‘섬망’이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아이는 묵묵하고, 씩씩하게 그 기간을 잘 견뎌 내었다. 회진을 가서 아이에게 괜찮으냐고, 아프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늘 견딜만하고 괜찮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대답이 난 무척 신선했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은 수술하고 나면 아프다고 울거나 수술 상처부위를 소독하러 가기만 해도 무섭다고 인상을 찡그리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 가서 “간호사 이모들이 잘해주니?”라고 웃으며 물어보니 아이는 그저 미소를 짓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애가 장하다고 야단이었다. “어떻게 이런 애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뻐 죽겠어요” 많은 중환자 아이들을 본 간호사들이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그동안 보아 왔던 아이들과는 달리 이 친구가 특이하기는 한 모양이다.
오래 아픈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또래보다 미리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지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영악해지고 시니컬하며 심지어는 표독스럽게 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타고난 성품의 차이인가?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왜 나에게만 생기느냐고 불평하고 운명을 저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생긴 일에 대해 이유를 따지기보다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고 천진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확실히 더 나은 것 같다. 정신이 퇴행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받은 천상병 시인이 ‘귀천’이라는 시에서 세상을 보고 돌아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거라는 그런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 한다.
신장을 이식받은 이 아이도 지금은 다행히 소변이 잘 나오고, 이식한 신장기능이 회복 중이다. 더 투석은 안 받아도 될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양산부산대병원 외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