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물러가는 단풍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볼까 싶어 주말에 아내와 함께 경부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모처럼의 동반 나들이에 신이 났는지 옆에 앉은 아내는 연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지만 아내의 핀잔을 피하고자 마치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는 양 1시간만 가면 좋은 곳이 있다고 굵고 낮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으며 말해줬다. 그윽한 향의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옆 좌석의 아내를 보며 필자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집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단풍 시즌의 괜찮은 방문지를 떠올려야 했으나 경부고속도로 경주 톨 게이트가 다가 오는데도 어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급한 대로 경주로 빠졌다. 기왕 경주에 왔으니 오랜만에 석굴암에도 올라가 보자는 구세주와 같은 아내의 말이 들려왔다. 속으로 “옳지!”를 외치며 사실 가려던 곳이 있었는데 원한다면 석굴암으로 바꾸겠노라며 양보하는 척하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었다.
단풍으로 물든 토함산의 자태를 보니 오랜만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석굴암에서 내려와 식사하러 가는 길에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사설 박물관 간판이 보여 들어가 봤다. 1960년대에 태어난 우리 부부에게 어렸을 때를 추억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주제별로 재현된 학교·이발소·상점·군부대·다방·화장실 등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오래된 교실 벽에 붙어있는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화재 예방 표어를 발견했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는 무슨 기념일이나 기념주간이 되면 표어나 포스터 공모, 웅변대회를 했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구였지만 건조해지는 11월이 되면 거의 매일 담임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표어를 복창했던 기억이 있다.
화재· 태풍·홍수·지진 등 인간 생활의 안전을 위협하는 많은 천재(天災)가 있지만, 화재는 주로 실수 또는 고의에 의한 인재(人災)에 가깝다. 그중 1971년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는 잊지 못할 기억 중의 하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TV 뉴스를 통해 본 화재의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16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50년이 지난 지금도 손에 꼽을 정도의 큰 화재로 기록된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2008년 경기도 이천 냉동 창고 화재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2018년 밀양 모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는 5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나와 최근의 큰 사고로 꼽힌다. 화재에 관한 영화 속 기억으로, 훌륭하게 지어진 세계 최고의 호텔 오픈파티가 있는 날 그 호텔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을 그린 1977년 국내 개봉 미국 영화 ‘타워링’과 2012년에 비슷한 스토리로 개봉된 우리 영화 ‘타워’가 기억난다.
얼마 전,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하던 학과 제자가 정보통신직 소방공무원에 합격했다며 인사차 다녀갔고, 임상간호사로 근무하다가 간호직 소방공무원에 합격했다는 다른 학과 제자의 전화도 이틀 간격으로 받았다. 같은 채용을 통해 신분이 안정적인 직장으로 옮긴 것을 축하하는 한편, 한 명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두 명의 소방공무원을 지인으로 두게 되는 바람에 관심이 생겨 통계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평균 4만여 건의 화재로 2000명 이상이 사망한다고 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하루 120건 내외의 화재로 5, 6명은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화재 대응 시스템을 비롯한 사회안전망이 과거에 비해 잘 구축되어 있지만 화재 건수나 사망자는 좀처럼 크게 줄지 않는다. 화재가 나면 생명의 위험뿐 아니라 재산상의 손해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화재를 진압해야 하는 소방관들의 수고로움은 더 말해 무엇 하랴. 이젠 소방공무원의 길로 들어선 두 제자의 안위도 걱정스럽다.
국가는 화재신고 번호인 ‘119’를 인용하여 11월 9일을 ‘소방의 날’로 지정하고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하고 있다. 오늘, 58번째 ‘소방의 날’을 맞아 화재 예방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한다. 또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위험과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는 소방공무원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한다. 아울러, 국민이 소방공무원의 직무와 역할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여 불요불급한 소방 출동이 없길 바라고, 소방업무에 대한 정부 및 정치권의 전폭적인 예산 및 행정 지원 또한 기대해본다.
부산가톨릭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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