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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악의 천박함 /전진성

어두웠던 역사적 고통, 몇몇 악당에 전가하거나 용서하고 화해한다면 심각 사안 호도할 수 있어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1-04 19:19:51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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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감독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의 전기 영화 ‘한나 아렌트’는 격동의 20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정치철학자의 고뇌를 다룬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이 배경이다. 이 재판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국역본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국내 식자층에게도 소개된 바 있다.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망명지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납치돼 이스라엘로 끌려온다. 그야말로 세기의 재판에 회부돼 갖은 변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요 전범으로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이 악한을 두고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아렌트는 친(親)이스라엘 유대인들과 사상적 갈등을 겪는다.

영화 ‘한나 아렌트’는 지극히 비타협적인 이 여성 철학자가 사회적 유대의 단절 및 심지어 폭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적 험로를 치열하게 개척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시각으로는 아이히만의 근본적 악덕은 남다른 악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악을 행할 만한 내면적 용기도, 기발함도 없는, 이른바 ‘사유의 불능’ 상태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그릇된 명령이라도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만 몰두하는 저열한 정신 상태야말로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미증유의 거악을 양산해낸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사탄의 저주가 아니라 노예 근성이 가공할 지옥을 만들어낸 셈이다.

미국 시사지 ‘뉴요커’에 실린 아렌트의 취재 기사들을 정리한 1963년도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에는 ‘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2006년의 국역본은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번역해 우리 지식사회에 정착됐다. 그런데 아렌트가 말한 banality는 ‘평범성’과는 좀 거리가 있다. 실로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덕은 그가 평균적인 수준에서 사고했다는 점이 아니라 형장에서조차 진부한 말들을 나열할 정도로 철저히 외면적인 가치에 종속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늘 자신보다 강하거나 우월한 권위에 의탁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히만의 악행은 극도로 천박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은 그릇된 명령을 따를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이 못난 사내는 모든 심각한 사안을 늘 편리하게 정당화하며 세태에 영합하면서 살아갔다는 점에서 흉악하다기보다는 속물적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발간되자마자,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녀는 유대인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그녀가 나치와 협력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실상을 과감히 폭로한 데 있었지만 아이히만을 해석하는 그녀의 관점에 대해서도 심히 불만이 많았다. 나치에 의해 고통 받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 극악한 범죄자를 마치 평범한 사람처럼 취급하는 관점은 그릇된 것이었다. 또한 나치 체제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인 후세대 연구자들은 아이히만이 아무 생각 없이 서류에 도장이나 찍던 ‘탁상의 학살자’가 아니라 닳고 닳은 정치꾼이었음을 각종 자료를 통해 증명하면서 어떻게든 처벌을 피해보려고 꾸민 그의 바보 전략에 순진한 철학자가 속아 넘어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이 심오한 철학자의 메시지를 오독한 데 불과하다. 아렌트의 메시지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식의 단순 논리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꼼꼼히 읽어 보면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그저 멍청한 명령 집행자로 보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의 면모까지 보인다. 법정에서 그는 칸트의 도덕 법칙까지 들먹였는데 이는 위선만은 아니었다. 그는 우월한 권위에 의탁하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적적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렬하게 사형 당하는 편이 낫다고 발언했으며 실제로 교수대 앞에서도 의외로 당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라 ‘광대’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어두웠던 역사적 과거를 헤집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이다. 올해는 5·18광주항쟁 40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이다. 피해자들이 겪은 모든 고통을 몇몇 악당에게 전가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용서하자는 식으로 정리하면 무척 편리하지만 진지함이 결여된 이 같은 천박한 역사 인식은 모든 심각한 사안을 호도하는 악의 천박한 속성과 매우 닮아있다. 아이히만의 우스꽝스런 당당함처럼 악은 세상사를 대하는 우리의 세심함이 멈추는 순간 그릇된 신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아렌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이히만의 악행을 이해하는 일은 그를 용서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가해자들의 천박한 자기 확신만큼이나 용서와 화해라는 편리한 신념도 용서할 수 없다.

부산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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