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처음 닻을 올렸을 때 중구 남포동 극장가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다. 영화 좀 안다 자부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다 모인 것 같았다. 극장마다 골목마다 독특한 차림새의 젊은이들이 북적댔다. 기대와 열정의 도가니였다. 영화제 초기부터 든든한 후원자였던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보통은 영화제가 영화인들만의 행사인데 여긴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 축제로 소비된다”며 신기해했다. 부산은 그때까지 아시안게임이나 월드컵같은 대형 국제행사를 치른 경험이 없었다. BIFF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BIFF의 성공적인 시작이 이랬다.
영화제에서 영화 못지 않은 재미가 사람 구경이다. 유명 감독이나 배우를 옆집 아저씨나 누나 보듯 한다. 한번은 개막식 레드카펫을 느릿느릿 걷던 임권택 감독이 부인에게 살짝 타박듣는 장면을 목격했다. 거장의 이런 뒷모습 훔쳐보기가 영화제니까 가능하다. 해운대 바닷가에 차려진 비프빌리지는 배우와 마주치기 딱 좋은 장소다. 누가 말을 걸어도 받아주겠다는 자세다. 자국에서 국민배우로 대접받는 사람인데 국내 팬들이 너무 무심해 그를 어렵사리 초청한 주최측이 난감해하기도 한다. 축제의 밤은 호텔 리셉션과 파티로 무르익는다. 그러나 운치는 길거리 포장마차만 못하다. 선술집 옆테이블의 외국인이 사실은 세계 영화계를 꿰뚫는 유명 영화제 집행위원장일 수 있다. 갑자기 태국 공주가 도착했다며 함께 무릎을 꿇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을 맞더라도 놀랄 필요 없다. 이 모든 게 BIFF다.
제25회 BIFF가 지난 21일부터 열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30일 폐막한다. 2주 늦게 시작한 영화제는 코로나19 때문에 아예 못 열릴 뻔했다. 대신 모든 오프라인 대면행사가 취소됐다. 개·폐막식은 물론이고 화려한 레드카펫 행사와 축하공연도 없었다. 손님은 국내 영화인 일부가 찾았을 뿐 해외 게스트는 초청하지 못했다. 상영편수와 상영관은 대폭 줄었다. 상영횟수 제한과 거리두기 영향으로 관람객수는 예년의 10% 정도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영화제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던 자원봉사자들을 이번엔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부산의 가을이 영화제로 시작해 영화제로 저물어간 세월이 25년이다. 부침이 있었지만 올해처럼 사람 냄새 없기는 처음이다. 그나마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들은 영화제가 열린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부디 내년에는 설레는 축제의 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