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미국 대선 TV토론은 여러 의미로 기록적이었다. 시청률부터 그랬다. 1차 토론땐 역대 최다인 8400만 명이 지켜봤다. 선거사에 남은 건 이뿐만 아니다. 공당의 대선 후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튀는 트럼프의 말투와 행동 때문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조롱은 보통이고 욕설도 나왔다. 발언 중인 힐러리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정말 형편없는 여자”라고 비웃던 트럼프의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바이든과 치르는 이번 재선전도 다르지 않다. 22일(현지시간) 마지막 토론회에서 말을 끊으면 마이크를 꺼버리겠다고 주최측이 엄포를 놨을 정도다. 그러나 미국 유권자 입장에선 날것 그대로의 공방전을 보면서 자신들이 가진 표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것이다.

1대 1로 맞붙는 설전에선 후보가 고관대작에 오르려는 욕심만큼 공부가 돼 있는지, 이미 불거진 논란을 무슨 변명으로 덮는지, 말도 안되는 억지를 얼마나 품위있게 받아치는지가 보인다. 실력과 자질, 심지어 인성까지 드러나는 게 이 각본 없는 정치 드라마의 묘미다. 그래서 TV 토론은 미디어 선거의 꽃이라 불린다.

김대근 부산 사상구청장이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토론회를 고의 기피한 혐의로 얼마전 1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재판부는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아 선관위 주최 토론회에 불참한 행위(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에 대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벌금 50만 원을 선고했다. 별개의 정치자금법 위반 벌금형이 있지만, 거짓 수단에 의한 토론 기피가 당선무효형에 결정적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위계로 토론회가 무력화됐고 유권자의 알 권리가 침해됐기 때문에 결코 죄가 가볍지 않다”고 밝혔다. 허위진단서라는 적극적인 기망 행위가 양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의 토론 회피에 단순 과태료 처분이 아닌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실형을 선고한 이번 재판부의 판단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토론 기피가 일상이 된 우리나라 선거 풍토에선 더욱 그렇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때부터 도입된 게 TV토론이다. 벌써 25년이나 흘렀지만 토론 문화가 뿌리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토론회가 열려도 재미를 찾기 힘들거니와 그마저도 후보들은 거부할 명분 찾기에 급급하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부산 기장군에서는 유력 정당 후보가 불참하는 바람에 토론회 자체가 무산됐다. 주요 정당의 부산시당위원장 토론회마저 없던 일이 됐다. 고만고만한 출마자가 많지만 유권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지방선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름의 불참 이유는 있다. 유세 일정으로 바쁘다거나 토론 방식이 마음에 안든다는 등의 핑계를 댄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지역 현안에 어둡고 콘텐츠 고민이 없는 사람은 자신있게 나서기 힘든 게 토론이다. 엉뚱한 공약을 남발했다간 상대에게 약점만 노출된다. 이래저래 켕기는 일이 많은 후보는 더 두렵다.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는 후보 역시 필요를 못 느낀다. 괜히 말실수라도 하면 점수만 깎이기 때문이다. 인지도는 높으나 걸맞은 내공이 없는 현역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렵기도 하다. 영남이나 호남처럼 특정 정당의 당세가 지배적인 곳에서 당내 정치만으로 입지를 굳혀온 후보의 토론회 기피가 잦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유권자에게 자신의 정견 한번 제대로 설명 않고도 당선되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이다. 이런 인물이 우리 동네 구청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는, 누가 뭘 하는지 모르는 사이 임기를 채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미국 선거 TV토론의 역사는 올해로 60년째다. 1960년 당시 정치 초년병이던 케네디와 거물 정치인 닉슨의 대결은 승자가 이미 정해진 듯했다. 그러나 카메라를 정직하게 응시하며 자신감 있는 어조로 토론에 임한 케네디가 유권자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고 판세는 뒤집혔다. TV 토론의 영향력을 보여준 신화적 사례로 지금까지 자주 언급된다.

선거에서 TV 효과는 예전만 같지 않다. 이미지 정치로 흐르는 데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그러나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선동이 아닌 양쪽을 비교하고 저울질 할 기회는 역시 토론 밖에 없다. 정치는 설득과 소통의 과정이다. 생각을 정리해서 말로 표현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 합일점을 찾아가는 과정 모두가 소통이다. 토론을 하지 않겠다는 건 소통을 않겠다는 말과 같다. 이런 토론 부재의 정치 문화가 한국 정치의 저질화를 초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구청장 사건의 1심 판단이 상급심까지 이어질지는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선거는 당내 소통보다 유권자와의 소통이 우선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결코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판결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이런 부분일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