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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럼] 동의서의 무게 /한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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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10-05 19:55:04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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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古木)의 나이테처럼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인 할머니와 진료실에서 마주앉았다. 며칠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할아버지의 수술 동의를 받기 위해서다. 구부정한 허리를 의자에 불편하게 기댄 할머니는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평소 산책도 잘하고 잔병치레도 없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겨우 응급실로 데려왔고, 아직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한다.
“네, 걱정이 많으시죠? 여기 물이라도 드시고 마음을 좀 가라앉히세요. 자제분은 안 오고 혼자 오셨어요? 할머니 혼자 결정할 수 있으세요?” 아… 할머니가 난청(難聽)인데, 보청기 사용을 안 하신다. 데시벨을 한껏 올려 질문을 반복한다. 아들, 딸이 있는데, 큰딸은 멀리 강원도에 살고, 아들은 중증정신지체가 있다고 한다. “따님과 함께 설명 듣는 게 좋겠습니다. 연락해보셨어요?” “그 아가 어릴 째 산몬디 하꼬방에서 살았데이, 남들맨키 핵교도 몬 배우고, 성치 않은 즈그 동생 돌본다꼬 쎄가 만발이 빠졌는데, 인자 먼데 시집가서 즈그 잘살면 되제, 먼다꼬 연락할 끼고?” 할머니의 사투리는 주름보다 진하고 깊다.

어릴 때 잘해주지 못한 딸에게 늙은 아비의 질병을 알리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도 지금 따님한테 연락하셔야 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 심장을 수술해야 하는데 아주 큰 수술이고, 동의서도 적어야 돼요.” “아이다. 연락 안 할 끼다. 할배 콩 팔러 가도 할 수 엄따. 고마 내한테만 말하소.” 할머니는 남편의 죽음을 ‘콩 팔러 간다’고 에둘러 표현한다. “할머니, 따님 연락처 주시면 저희가 연락해볼게요.” “모린다. 엄따, 아이고… 상그랍구로. 내가 몬할끼 머꼬? 할배 안 되 긋다고 그라요?”

할 수 없이 질병 상태, 수술 필요성, 위험성과 합병증 발생 가능성 등을 담은 동의서를 설명해본다.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니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할머니의 난청은 점점 목을 아프게 한다. 집중해 듣던 할머니가 자세를 풀고 묻는다. “근데, 내는 잘 모르겠고… 울 할배 죽는 기요? 안 되겠소? 살믄 수술시킬 끼고, 수술해도 안 된다카믄 할 수 엄꼬….” 할머니는 수술 후 맞닥뜨릴 남편의 생존 여부만 듣고 싶어 한다. 난감하다. 이름조차 어려운 합병증의 가능성과 수술을 포함한 의료행위의 정당성, 그럼에도 발생할 수 있는 사망의 가능성을 이미 혼란에 빠진 할머니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딸이 내려와 동의서를 쓰고서야 겨우 수술할 수 있었다.

수술 면담을 하는 환자와 가족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앉자마자 녹취 버튼을 누른 휴대폰부터 꺼내기도 하고, 질병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와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묻기도 한다. 경비를 미리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보호자도 있고, 수술 후 합병증 발생으로 처음 들었던 대략의 경비(합병증이 없을 경우)에서 초과된 부분을 못 내겠다 떼쓰던 가족도 기억난다. 지금은 의료행위 전 그 내용 설명 여부에 따라 의사의 과실을 판단한다. 특별서약서, 수술동의서, 수혈동의서, 중환자실 입실동의서… 환자와 가족의 알 권리가 중요해진 만큼, 설명을 하고 서명을 받아야 하는 서류도 많아졌다. 한두 시간은 너끈히 걸린다.

할머니처럼 대부분 환자와 가족은 수술 결과에 대한 확신을 요구하며, 치료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변수는 의사가 알아서 성공적으로 치료해주기 바란다. 환자나 가족이 원하는 것을 의사는 안다. ‘환자가 수술받으면 반드시 좋아지겠습니다’는 확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기가 두렵다. 사망 가능성이 있는 심장수술을 집도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의사는 죽음을 관장하는 하데스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권능을 갖는 허황된 상상을 한 번씩 한다. 하지만 수천 년 전 의성(醫聖)인 히포크라테스도 ‘의사는 간호할 뿐이고, 자연(신적인 존재)이 치유한다(medicus curat, natura sanat)’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인간인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뿐이다. 그 약속은 언제나 목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A4 용지 단 두 장의 동의서의 무게다.

부산백병원 흉부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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