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는 승리의 여신이다. Just do it! 해 봐. 그것을 해봐. 역동적이고 간명한 이 광고 카피는 대중을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명령형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 일단 해보기로 하자. 승리의 여신은 무엇이든 하라고 한다.
하지 마. 위험해. 금지가 많은 세계에서 자란 나는 일단 해보라는 이 말이 좋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무엇인가를 하라고 격려하는 운동화의 세계가 좋다. 운동화는 외부를 부른다. 신선한 공기와 길과 사람 속으로 몸을 끌고 간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스파르타의 고전적 클리셰는 몸에 관한 한 여전히 유효하다.
늘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마음이 안으로 닫히는 날이 있다. 단지 해보라는 말이 압박이 되는 날이 있다. 움직이기도 싫고 무기력한 날이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싫고 먹기도 싫고 숨을 쉬기도 싫은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왜 무엇을 꼭 해야 하나.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럴 때 누가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살아있어! Just be it!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그냥 존재하기만 해. 너는 이기고 있는 거야. 잘하고 있어. 말없이 어깨를 쓰다듬어주면 좋겠다. 밖을 잠시 닫아걸고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시간은 휴식이기도 하고 재충전이기도 하지만, 휴식이나 재충전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견디는 거야. 괜찮아. 잘 하고 있는 거야.
Do(하다)와 Be(있다)는 수평적 개념인 동시에 수직적 개념이다. 수평적 개념일 때 Do와 Be는 대등하게 행동과 존재로 나뉠 것이다. 수직적 개념일 때 Be가 상위개념이다. 행위 Do는 존재 Be를 지향할 때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Do를 강요받는다. 회사와 학교와 가족은 그 구성원이 가만히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잠시라도 멍 때리는 꼴을 못 보는 Do는 동적이고 빠른 움직임을 미덕으로 친다. 결과를 보여줘. 계획과 결과물을 요구한다. 완료형 결과물로서의 단기적 성과와 연결된다. 속도와 경쟁 속에서 수행될 때가 많으며, 우열과 상하로 비교된다. 성과 위주의 근대산업사회를 거치고 초고속성장 사회에 이르는 동안 Do는 역동적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나 스트레스와 피로의 주범이 된다. 무슨 일을 하니? 무엇을 하고 싶니? 할 수 없는 일이 많은 지금 같은 마이너스성장 사회에서 Do를 포함한 친절한 질문은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례와 폭력이 된다.
Be는 길고 크다. 존재 그 자체이며 Do를 포함한다. 도구가 아닌 목적이다. 정적이고 느린 움직임이다. 삶 그 자체이므로 장기적이다. 단기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다. 굳이 결과라면 삶이 결과이다. Do가 전투라면 Be는 전쟁이다. 궁극적인 승패는 단기적 결과로서의 Do가 아니라 장기적 과정으로서의 Be가 결정한다. 평생 살고 난 후에 비로소 잘 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될 뿐이다. 어떤 위대한 사람은 죽음으로 다시 살기도 하지만 드문 예외이다.
Be는 진행형이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 패배는 없다. Be는 제각기 다른 차이가 있을 뿐. 그 사이에 우열도 없고 상하도 없다. 모든 존재는 다르고, 다르므로 같고 귀할 뿐이다. 살아있는 것이 승리이다. 승리의 여신은 이제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Just be it! 존재하라. 살아라.
비대면 긴급국회간담회 방청객으로 들어갔다. 주제는 청년자살, 특히 가파르게 증가하는 20대 여성의 자살이었다.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지 못한 교육정책, 본받을 모델 어른이 없는 사회,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기 자식에게 기득권을 물려주며 독점하려는 어른,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 IMF와 금융위기 피해자가 된 가난한 부모 세대의 대물림 절망, 총체적 난국이다. 역병에 가려진 음압의 거리에서 여성 청년들이 죽어간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기형도의 시 구절이나 중얼거리는 나는 얼마나 무책임한 어른인가. 자괴감에 가슴을 친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