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제목이다. 영어로는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21세기에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으니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가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 유명한 칸트도 정의를 논했다. 내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정의를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했다. 내일 종말이 오면 모두 죽는데 사형은 왜 집행해야 하는가?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역시 칸트답다고 할 수 있겠다.
정의(正義)는 옮음이다. 샌델 교수의 책 제목을 빌리면 옳은 일(right thing)이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적들을 정의로 데려오든지 정의를 적들에게 가져가든지, 정의는 실현될 것(Whether we bring our enemies to justice or bring justice to our enemies, justice will be done.)”이라고 했다. 미국은 그것이 옳다고 보아 정의라고 한 것이다. 결국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은 2011년 5월 오바마 대통령의 승인 아래 진행된 CIA의 작전으로 파키스탄에서 미군에 사살됐다.
무엇이 옳은지는 판단의 영역이다. 다양한 갈등이 있는 다원주의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옳은지 항상 논쟁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 논쟁과 갈등은 많은 경우 최종적으로 법원에 의해 법률적으로 해결된다. 정의가 종종 법의 목적 또는 법의 이념이라고 설명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미국 법무부는 Department of Justice이고, 심지어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Justice라고 부른다. 대법관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법률적 정의를 선언한 기념비적인 판결이 많이 선고됐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우리 사회도 점점 사회적 갈등이 법원으로 집중되는 추세다. 법원 판결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지금처럼 높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최근 전교조에 대해 ‘법외노조 처분은 무효’라고 판단한 대법원판결이 대표적이다. 국제신문도 지난 4일 자 8면에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사회 갈등의 법원 집중에 대한 대응책으로 법원은 법관 증원, 전자소송 도입 등 시스템을 개선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건은 넘쳐난다. 사건의 홍수 속에 법관과 법원 직원들의 야근은 일상화됐다. 그런데 법원 신뢰도는 끔찍할 만큼 낮다. 사회가 진영논리에 매몰돼 법원 판결이나 결정이 마음에 안 들면 온갖 비난을 퍼붓고, 가끔 수준 미달 판결이 선고되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진영 논리가 있고, 법관 수준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법원에 대한 신뢰도를 좌우하지 않는다.
법원은 정의를 선언하는 기관이다. 그 정의는 증거와 법리를 기초로 성찰의 결과 도출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국민이 법원에 기대하는 것이다. 법리는 사리에 맞고 시대 정신에도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법리는 법원이 바꾸면 된다. 증거와 법리를 기초로 성찰해 사건별로 결론을 선언하면 된다. 그것이 법원이 국민 신뢰를 되찾는 비결이다. 그러나 필자가 경험한 법정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증거 속에 없는 사실이 인정되기도 하고, 기본적 법리에 반하는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섣부른 예단으로 필요한 심리를 하지 않기도 한다. 정확한 결론 도출보다는 사건을 ‘처리’하는 데 급급한 모습도 있다. 무엇보다 여론에 휘둘릴 위험성이 걱정이다. 최근 사법부 독립의 적은 여론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여론에 영합한 판결은 독립된 법원의 존재이유에 반한다.
현대사회의 정의는 법적 정의일 수밖에 없다. 법원이 법적 정의를 선언할 때 신중하되 용기가 있었으면 한다. 해방 이후 우리 법원은 적어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서는 그렇게 못 했다. 좌고우면했고 눈치를 많이 봤다. 눈치 보는 대상이 정권인가, 법원행정 당국인가, 여론인가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론도 법원 판결을 피상적으로 보도만 할 게 아니라 정의라는 관점에서 의미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알려주면 좋겠다. 변호사·독자권익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