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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계몽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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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 변혁을 꿈꾸던 학창 시절부터 몸에 밴 논리가 있지 않나.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그때 판단 기준은 ‘진영’이다. 그래 맞다. 최종 목표가 신세계 아닌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목에 생기는 티눈 하나쯤이야. 그렇게 짜인 프레임은 다소의 일탈을 정당화한다. 시간이 지나면, 한번 두번 하다 보면 모든 행위를 자기합리화한다. 진영을 지키는 게 먼저니까. 그때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서해 최북단 소연평도 인근 북측 해상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만행이라고 분노했다. 청와대 역시 ‘국제규범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동’으로 규정했다.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촉구했다. 그때 든 생각은 북한이 과연 사과할까였다. 그동안 보여온 북한 정권의 행태가 너무나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상 보는 눈의 짧음 탓일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사과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김 위원장의 통지문에는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놀란 건 나만 아니었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일 수 있다.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가면 안 된다는, 진영을 지켜야 한다는 걱정이 먼저였을 것이다. 당장 여권 인사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나왔다.

기쁨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개인의 비참한 죽음을 남북관계 국면 전환의 희생쯤으로 여기는 것 일까. 김 위원장이 ‘계몽군주 같다’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평가에 좀 많이 놀랐다. 유 이사장은 “우리가 바라던 것이 일정 부분 진전됐다는 점에서 희소식”이라고까지 했다. 계몽군주가 무엇인가.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군주가 아닌가. 인권을 위해 사법 제도를 고치는 등 봉건적 전통을 벗어나 개혁을 추진하는 군주다. 당장 야권에서는 “계몽군주가 아니라 폭군”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역시 프레임은 그런 것이다. 여기에 갇히면 옳고 그름은 뒷전이다. 가치 판단의 기준은 득실이니까. ‘진영’의 생존이 우선이다. 도덕과 윤리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유 이사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도 그의 말은 소위 ‘좌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때 사건은 옳고 그름이 아닌 ‘진영’ 대결로 본질이 흐려질 것이다.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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