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성추행 사건으로 중도 사퇴하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추행 혐의를 쓰고 자살한 직후의 일이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장사꾼도 신뢰가 중요하다”며 내년 4월 부산과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여당 무공천을 제안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입장이 바뀌었다. “무공천을 주장한 게 아니라 의견을 냈을 뿐”이라고 한발 뺀 것이다. ‘주장’과 ‘의견’은 다른 말이라는 이 해괴한 해명 해프닝은 부산과 서울시장직에 대한 여당 지지세력의 집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 당헌 96조에는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중대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하면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걸 지킬 것이라곤 누구도 믿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아직 시간이 많다”며 보선 관련 언급을 자제하는 건 미리 매를 벌기 싫어서일거다. 반면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좀 다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보 자질에 대해 속내를 비췄다. 다만 화법이 모호해 진짜 의중을 알 수 없기는 이 대표나 마찬가지다. 비전을 갖춘 인물이 당내에 얼마든지 있다 하면서도 외부 인사 접촉설이 나오고 어떤 땐 경륜을, 어떤 땐 새로움을 강조해 잠재 후보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후보 선출방식도 경선인지 전략공천인지 아리송하다.
지금 부산시장 후보군이라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여야 합해 10명이 넘는다. 물론 잊히는 게 두려워 자가발전한 경우도 상당수일 것이다. 가장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벌이며 가시적으로 움직이는 부류는 야당 인사들이다. 이번 보선의 원인 제공자가 민주당이니 여당은 아무래도 켕기는 면이 있고, 한껏 기울어졌던 운동장이 지난 총선에선 원상회복의 조짐을 보였으니 야당 입장에선 이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총선 결과만 놓고 보면 부산이 다시 자기네 안방이 됐다고 착각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중에 시장감이 있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문제다.
서병수 의원은 오 전 시장 사건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보선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잘랐다. 그러나 그 다짐이 오래 가지 않았다. 한두달 후 “지금은 거취를 밝힐 단계가 아니다”며 가능성을 열더니, 최근엔 “지난번에 꿈을 제대로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꿈은 여전히 갖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던 김세연 전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6년전 민선 6기 지방선거전에서 서 의원은 당내에선 일찌감치 대세론을 형성했으나 대중적인 인기는 별로 없었다. 여론조사 지지율도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 의원이 막상 시장에 당선됐을 때 관료 출신 20년을 겪은 부산 시민의 기대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측근들의 부정부패, 엘시티 비리, 가덕신공항 유치 실패, 문화계와의 충돌을 부산 시민은 똑똑히 기억한다. 민선 7기 지방선거에서 서 의원이 패한 건 문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 무드 조성같은 외부요인도 있다. 그러나 서 의원은 훨씬 이전부터 오 전 시장과의 가상대결에서 이미 지고 있었다. 오거돈을 등판시킨 건 민심을 등돌리게 한 ‘서병수 시정의 실패’였던 것이다. 임기 4년을 측근들의 잇단 구속과 바람 잘 날 없는 논란으로 얼룩지게 했으면서 그가 완결하지 못했다는 꿈은 대체 무엇인가.
야권의 부산시장 후보 가운데 “나의 과거를 궁금해하지 말라”는 사람이 어디 서 의원 뿐일까. 당이 기울 땐 달아났다가 볕이 들자 되돌아온 해바라기들,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10년 이상 하면서도 기억에 남는 업적 하나 없는 자칭 중진들, 개인의 경쟁력이라고는 1도 없어 정당 공천을 못 받게 되자 곧바로 출마를 포기했던 인사들이 이번엔 부산시장직을 넘보고 있다. 전 정권과 전전 정권에서 자질과 실력을 이미 들켰는데 유권자들이 모두 잊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 용감함이 가상하고 그 무모함이 어이없다. 30년 이상 부산의 터줏대감을 자임하면서 도시를 이 지경으로 몰락시킨 사람들이 무슨 배짱으로 또 나서겠다는 건가.
부산은 수도권에 맞설 비수도권의 유일한 대안이다. 인천에도 밀리려는 도시의 위상을 다시 추스르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사령탑이 중요하다. 부산시장이나 시장 후보가 경륜과 경험이 있으면 좋고, 비전과 철학이 있으면 더 좋고, 참신하기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거기에 빠지지 않아야할 건 딱 상식 수준의 염치일 것이다. 그 정도의 덕목만 있어도 ‘믿는 건 시민의 건망증뿐’이란 듯 자천타천의 후보들이 이렇게 난립할 리가 없다. 내년 보선은 대선의 1라운드다. 1년3개월짜리이지만 하기에 따라 10년이 될 수도 있고 대권가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자리에 이미 밑천이 드러난 올드보이를 앉힐 순 없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