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30일. “원하옵건대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신이 미리 생각할 수 없는 바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첫 해전을 앞두고 출전을 아뢰는 ‘임진장초’의 글이다. 조정에 올린 이 글에서 이순신 장군은 모든 준비를 해두고 결단의 순간이 왔을 때 성공과 실패, 이익과 해로움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의견을 조율하고 더 나은 상황 전개를 도모하기 위한 마지막 기다림의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옥포해전은 시작되었다. 준비의 시기가 있고 결단의 순간이 있으며 행동해야 할 때 가 있다.
1592년 5월 7일 벌어진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도도 다카토라가 이끌던 왜의 수군을 공격하여, 아군의 피해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
극심한 불황이 왔을 때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곳은 많은 고정비가 들어가는 회사들이다. 외화가득률과 고용 파급효과가 가장 높으면서도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 조선사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해상환경오염 예방을 위한 고강도의 규제, 청정에너지로의 전환기, 기술변혁 시대의 도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상을 얼어 붙게 만든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 조선 산업의 내일조차 내다보기 힘들게 한다.
2019년 3월부터 진행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인수합병 건은 현재 해외기업결합 승인 절차의 막바지에 와 있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는 CSSC와 CSIC의 합병으로 중국선박그룹(CSG)이 탄생했다. 중국선박그룹은 세계1위의 조선소가 되었다. 일본은 이마바리조선과 저팬마린유나이티드(JMU)가 제휴한 상태로, 일본쉽야드(NIPPON SHIPYARD) 합작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경쟁력을 강화해 생존하기 위한 통합과 구조조정의 몸부림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소는 아직 통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이를 바탕으로 생존을 위한 탈바꿈을 감행하는 측면에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팽배하는 자국주의,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 등은 글로벌 경제와 무역 통상을 대폭으로 위축시키고 있어 세계 조선 경기의 호황은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장기 불황에 대비한 통합과 다운사이징(downsizing)이 불가피하다. 건조 규모를 신속하게 조정하고 기술 혁신을 더욱 가속화해야 한다. 고기술/고부가가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첨단 설비로의 전환, 새로운 조선사업 모델 개발 추진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의 대형 조선 3사는 이미 30년 이상을 현재의 설비를 기초로 보완하고 개선해오면서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급격하게 이뤄지는 시장 환경의 변화는 우리에게 확실한 변신을 요구한다. 결단의 순간과 행동할 때가 온 것이다. 조선소의 근력 강화, 신기술 선도, 고효율 설비 전환이 그 핵심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느닷없이 다가와서 우리의 일상생활과 경제 활동에까지 압박을 가한다. 판이 변하고 도구가 변하며, 사람과 관계가 변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절충을 원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화합하기를 원한다. 가정, 교육, 종교, 경제도 최적의 컨택트-언택트-온택트 사이의 하이브리드를 찾을 것이다. 이는 조선 산업계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선박을 운항하고 조선소를 운영하는 일 또한 최적의 하이브리드에 길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조선소들은 올해 신년사에서 디지털화·탈탄소화로 가는 대전환의 시대가 다가오고 급격한 환경 변화가 도처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맞이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다짐을 내놓았다, 인재 확보와 기술 혁신, 극한의 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생존 경쟁력 확보 그리고 기업결합을 통한 새로운 도약 또한 선언하였다.
이렇듯 변화하는 상황에 조선소가 대응할 수 있도록 큰 힘을 실어 주었던 국책은행의 설립 목적은 산업의 개발 육성, 사회기반시설 확충, 금융산업 및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특히 지속 가능한 성장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고, 이를 잘 관리하는 것이다. 마침 기간산업인, 세계 최대의 국내 조선 기업들이 결합을 감행하였으니 지속 성장 촉진을 위한 모든 조치를 끝까지 챙겨야 한다.
지속 성장의 요건은 지(智)· 덕(德)· 체(體)이다. 지는 기술과 인재이고, 덕은 사회적 책임이며, 체는 건강한 경제력이다. 한국의 조선소와 국책은행이 결단의 순간을 자각하고 행동을 할 때이다.
전 대우조선해양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