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사실상 코로나 19의 종식을 선언했습니다. 해외에서 유입되는 사례를 제외한, 중국 국내에서 발생하는 신규 확진자가 한 달째 없음에 따른 결정이라고 합니다.
그런 중국을 바라보는 다른 국가들의 시선이 마냥 곱진 않습니다. 제집의 불길 잡았다고 한숨 돌리는 그들에게 옆집으로 번진 불은 보이지 않나 봅니다. 책임을 묻기도 어려우니 인간적으로 야속한 마음만 듭니다. 광복절 집회 이후의 코로나 재확산으로 많은 국민이 생존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강화로 ‘흩어지면 산다’는 ‘웃픈’ 표어까지 등장하며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기능조차 약화되고 있습니다. 국난 극복에 강한 우리 민족이지만, 평정심과 의연함으로 버티기에는 직면한 현실이 참 가혹합니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마스크를 착용해 달라고 권하는 버스 기사에게 폭행을 가하는 승객이 있는가 하면, 현장에서 코로나 방역에 안간힘을 쓰는 의료진에게 바이러스를 옮기겠다며 껴안은 확진자도 있습니다. 자가 격리 원칙을 어기고 외출을 감행해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거나 거리두기 규제의 사각 지대에서 무분별하게 취식하고, 음주를 즐기는 안전 불감증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공공의 안전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해 저지르는 그릇된 행동입니다. 일부 종교 단체의 비협조적인 태도 또한 코로나 재확산을 조장한 이기적 행동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원인을 알더라도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치명적인 전염병이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지의 공포 속에서 계속해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의 유행을 기억하며 우리는 더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응을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윤리적 태도 또한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 깊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실내외 마스크 쓰기가 생활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여성의 화장이 가벼워지거나 아예 민낯인 경우가 많습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보통 민낯이라고 부르지만, 사회적 가면 뒤에 숨긴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인 얼굴을 가리키는 부정적 표현으로도 쓰입니다. 치부가 드러났을 때 우리가 보통 ‘민낯을 들켰다’고 하는 것처럼요.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긍정의 민낯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나 하나쯤이야,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나만 애쓴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생각으로 양심과 도덕의 눈을 피해 하고픈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로 간다면 코로나는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3월 이후 방역의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의료진과 실무 담당자들의 노고를 생각합니다. 경제적 타격을 감수하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에 동참하고 있는 소상공인, 자영업자들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며 이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는 희생양이 아닙니다.
각자 개인이 지켜야 하는 방역 수칙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 그들을 돕는 길이며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길입니다.
6개월이 넘은 코로나의 유행으로 우리는 많이 지쳐 있습니다. 각국이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 위선과 이기심 없는 민낯으로 우리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연대의 힘으로 우리는 위기와 시련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었습니다. 페스트에 걸린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 리유의 행동을 구원이라 말하는 신부 파늘루에게 리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
우리 모두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민낯을 보여 주세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