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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법률] 갚지 않는 법 /오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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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9-09 19:05:59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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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지 말아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한 말이다. 누군가 못되게 굴어도 똑같이 형편없게 대하지는 말라는 것이었고, 결코 손해보지 않겠다며 야박하게 지내지 말라는 얘기였다. 잠시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자신 역시 못나게 되는 것이며, 눈앞의 이득은 챙길지 모르나 세상의 품은 놓친다는 가르침이었다. 운전 중에 갑자기 끼어드는 차에 대고 씩씩거리는 흔한 풍경에서, 그리고 근래에는 좀더 다양한 유감스러운 상황에서 화를 즉각적으로 분출하거나 응분의 대가를 요청하는 모습을 맞닥뜨리면서 갚지 말라는 그 말을 떠올리곤 한다.
그림 서상균
법을 공부해 나가면서, 법이 운영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갚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더욱 생각하게 된다. 법도 사회의 산물이고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지라 고스란히 갚아주고 싶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바램은 법의 기본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문자 그대로, 빌린 돈은 갚아야 하고, 죄를 지은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법은 명한다. 뿐만인가. 누군가가 어떤 권리를 주장하면 그에 맞설만한 다른 권리를 내세우며 맞선다. 고통과 갈등을 두고 입장이 갈리면 법대로 하라며 서로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 일들, 법정으로 간 사안들이 괜찮게 다뤄지면 또 모르겠는데, 법적 처리 과정은 종종 자조감이 들게 만든다. 때때로 법은 서로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하는 졸렬한 마음을 터전으로 삼아 작동한다. 이미 일어난 나쁜 일을 헤집고 따지는 것이 법의 본연의 임무인지라 느끼고 달라질 가능성은 거의 차단된다. 과거를 단죄하면서 현재는 보듬지 못하고 미래는 앞서 지우는 격이다. 법적으로 문제되는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나 그 분노를 다른 부정적인 정동으로 대응하는 것이나 어차피 법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인간들이 벌이는 한심한 짓들을 그나마 덜 덜컹거리며 처리하라고 있는 것이 법이기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어리석고 부당한 일들이 횡행한대도 그렇거나 말거나 법은 제 몫은 언제나 챙긴다.

물론, 억울한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법이라는 공식적인 공간과 통로가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또한 법을 통하여 다친 데를 어루만지고 온당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은 여전히 기대되며 어느 정도는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법을 만나게 된 때는 그렇게 괜찮은 역할을 법이 수행하기에는 대체로 이미 너무 늦은 시기라는 점에 있다. 법 앞에 서기 전에, 법적 조치와 병행하여, 그리고 이후에도 다른 적절한 방도의 활용이 없다면 법만으로 당해 사안을 해소할 수는 없다. 누가 잘못했는지 또는 더 책임이 있는지 더 많이 물어내야 하는지 법적으로 결론은 나겠지만, 그래서 그에 따른 조치가 위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신 갚아주는 법의 기능은 딱 그 만큼이다.

다만 갚는 데 익숙한 법도 변모를 도모할 수는 있다. 대결구도로 움직이던 법장치를 일단 멈추고, 이제까지 주로 절차를 거치게 하면서 정작 갈등과 아픔의 핵심에는 다가가지 않았던 점을 살핀다면 다르게, 새롭게 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갚지 않는 법을 진심으로 희구해야 하며, 그럴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또한 법이 당장 나서서 상대방을 무찌르기보다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듣고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어느 단계에서 법적 정리를 행하더라도 누군가에 대한 배제나 보복이 아니라 공통의 책임을 수행하는 자세여야 하며, 모든 이에게 달라질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발터 벤야민은 브레히트의 ‘노자가 망명길에 『도덕경』을 쓰게 된 경위에 관한 전설’이라는 시의 주해에서, 인생의 가혹한 순간에 친절함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판단하고 단죄하는 법이야말로 친절함이 요청된다. 삶의 무상함은 공평하기에, 갚지 않는 법은 비현실적이고 법은 더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이는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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