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은 조선 왕조 제3대 태종의 장자로, 1404년 12살 때 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8월 6일 세자 제(禔)를 위한 관서로 경승부(敬承府)가 신설됐다. 경승부란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가 거처한 작은 궁궐이었다. 당대 석학 황희 변계량 등에게서 수업을 받으며 성장하지만, 세자는 공부에는 관심 없고 매사냥 등에 몰두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예사로 스승들의 강연을 거부하기도 했다. 청년기에 들면서 밤이면 경승부소속 젊은 내시들과 경복궁 담장을 넘어 시내 파락호들과 어울려 다니며 상해 사건을 일으키는 등 난잡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태종 18년(1418) 5월 10일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의 다음과 같은 엽기적 사건이 기록돼 있다. 세자는 벼슬아치 곽선이란 자의 첩실인 어리라는, 미색이 출중한 여인을 한밤에 경승부 내시들을 동원하여 납치해왔다. 조정 대신의 고자질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직접 경승부를 급습하고 어리를 색출해 궁 밖으로 쫓아버린다. 어리를 잊을 수 없었던 세자는 세자빈 숙빈의 아버지인 장인, 병조판서 김한로에게 울며 애걸복걸한다. 결국 김한로의 어머니가 손녀인 숙빈 생일을 축하하려고 경승부에 들어올 때 어리를 하인으로 분장해 데리고 들어왔다. 또 임신한 어리를 같은 방법으로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해산 후 다시 경승부로 데리고 왔다.
이 사실이 다시 발각되자 김한로와 은근히 김한로를 변호하던 황희는 귀양 가고 태종18년 6월 5일 세자를 경기도 광주로 내쳤다. 그러나 어리도 함께 가도록 조치한 것을 보면 아비로서 태종의 애틋한 심정이 엿보인다. 세자 제가 물러난 뒤, 6월 6일 속전속결로 경승부를 없애고 충녕대군 도(祹)를 세자로 책봉하고 세자부를 순승부로 바꾸었다. 양녕대군은 부덕의 소치로 세자 자리에서 내쫓겼다. 그 과정에서 양녕을 미색으로 홀렸던 여인 어리, 병조판서에 올라 어린 딸 숙빈의 지위가 왕후까지 이르기를 희망하여 어리를 경승부에 데려와 딸 숙빈과 함께 살게 한 김한로의 비정한 내심이 눈에 띈다.
이 사건 1년 전 태종 17년(1417) 4월 20일 호조에서 도자기에 관한 적폐를 바로잡고자 어전회의에 올려 가결된 규정에서는 조선 팔도에 산재한 분청사기 생산 공장에서 세금으로 거둬 왕실에 바치는 모든 도자기에는 중앙관서나 군·현의 이름을 새겨 넣도록 조치했다. 도자기에 관한 적폐란 공물로 거둬들이는 도자기를 사옹원에서 파견된 중앙관서 관리들이 공출 단계에서 착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 탓에 다수가 분실되고 나머지가 서울로 옮겨져 왕실 창고인 장흥고에 보관됐다. 장흥고는 궁중 각 부서에서 연회나 행사가 있을 때 도자기를 빌려주고 마친 뒤 반납하게 했다. 그런데 이때 감독이 허술해 감추거나, 파손됐다는 핑계를 대기도 해 결국 반납되는 숫자는 빌려준 분량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2009~2010년 경남 합천군 가회면 장대리에서 조선 시대 분청사기 가마터를 발굴했다. 놀랍게도 경승부명(銘) 파편 1점과 승(承)자만 남은 파편 2점이 발굴됐다. 이 파편들은 유약이 완전히 녹지 못했거나 가마의 천정에서 흙이 떨어져 그릇 바닥에 붙어버려 폐기된 기물들이다. 파손이 심하지만, 접시로 성형된 기물 외면에는 경승부라는 한자 형태가 또렷이 남아있다.
인화문으로 상감된 파편 문양들은 전해져온 경승부명 분청사기 국화문접시와 같은 크기이며 내·외면의 문양 크기, 종류 및 구성의 특징이 일치한다. 또한 2점의 승명 파편도 미루어 짐작하면, 경승부명 기물이었으나 敬 자와 府 자가 유실되고 承 자만 남아있다. 1417년 4월 20일 조정은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전국 팔도 모든 도자기에 관서명이나 지방명을 새겨 넣도록 했고, 당시 ‘승’자가 들어간 관서는 경승부가 유일했기에 이는 경승부의 승이 확실하다.
위 내용에서 조선 왕조가 개국한 이후 1417년 4월 20일 이전에 생산된 분청사기에는 어떠한 명문도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경승부명 분청사기는 1417년 4월 20일~1418년 6월 5일 세자 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으로 강등되고 그다음 날 6월 6일 경승부도 폐지됐으니, 대략 1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경승부명 분청사기는 장대리 이외 요지에서는 아직 파편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전세(傳世)된 경승부명 분청사기는 장대리에서 만 1년간 구워진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분청사기 가마터인 합천군의 감한리가 곧 오늘의 합천군 가회면 장대리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경승부명 분청사기를 볼 때마다 태종의 강력한 왕권 하에 경승부에서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거침없었던 성품이 상기되고, 결국 쫓겨나는 양녕대군의 뒤를 따라가는 여인 어리의 애잔한 모습이 나의 망막에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 오버랩된다.
경성대 공예과 교수·㈔부산문화유산연구회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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