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폭염, 코로나로 집콕이 어느새 일상이 돼버렸다. 집과 내 일터인 어린이집을 오고 가는 것 말고는 근래 외출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그렇다고 슬기로운 직장생활이나 슬기로운 집콕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일을 끝내고 오면 녀석의 털 때문에(강아지 달이는 털갈이 증이다) 집안 곳곳 청소를 한다. 청소하고 난 뒤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고, 녀석의 밥을 챙겨주고, 녀석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그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린다. 글 한번 편하게 쓰는 게 쉽지 않다.
점심을 간단히 해결한 뒤 냉장고 청소도 할 겸 문을 열어보니 편의점에서 사다 놓은 커피와 생수가 있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새우깡 생각도 났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미소가 흐른다. 나는 그것들을 백팩 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자우림의 노랫말처럼 할 일이 쌓여 있어(냉장고 청소는 뒷전이다) 훌쩍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도 없지만 나름 일탈을 한다. 비록 집 근처 뒷산에 오르는 거지만.
뒷산은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가끔 함께 올랐던 곳이다. 병환으로 누워계셔서 이제는 혼자 올 수밖에 없다. 아쉽고 애틋하다. 잘 닦여진 길이긴 하나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참새 한 마리가 총총걸음으로 나를 따라 왔다. 참새만 한 크기로 새파란 색깔에 긴 부리를 가진 ‘물총새’(촉새), 보리 두둑 안에 땅을 파 집을 짓고 그 안에 알을 낳는 ‘노고지리’, 열매(다래)가 익으면 벌어져 하얀 솜뭉치가 생기는데 솜이 되기 전 열매 맛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는 ‘미영’(목화)…. 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목화씨를 쐐기로 뽑아내기도 하고 소의 꼬리털을 두세 가닥 뽑아내 삼에서 빼낸 줄기에다 옭아매 올가미를 만든 뒤 매미 잡으러 산으로 놀러 다니기도 했단다.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란 그 시절, ‘자연’이 가장 좋은 친구였다고 했다. 그러고는 “뱃고동이 울 때마다/ 열아홉 설레는 꽃 피는 가슴/ 강바람 산바람에 검은 머리 날리며 목화 따는 아가씨”(‘목화 따는 아가씨’ 중)를 흥얼대며 ‘미영’이 내 이름과 같다고 나를 놀렸다. “그럼, 나는 목화 따는 아가씨였겠네.” 농담을 했다.
이런저런 추억을 더듬다가,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만큼 하늘이 참 맑다. 어떤 손길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게 파란색 물감을 칠해 놓은 듯했다. 마침, 바람도 알맞게 불어 내 몸에 붙은 땀방울을 날려 보냈다. 멍을 때려도 좋을 만큼 하늘은 푸르다. 나무 끝을 오가는 바람은 상쾌하다. 그리고 추억은 즐겁다. 얼마나, 빈틈없는 자연의 조화인가 싶다. 집에만 있다 보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뜻밖에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이상하리만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모든 자연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고 말한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내 마음이 그의 마음과 같다면… 웃으려나.
한참 오르니 정자 하나가 보인다. 정자에 앉아 가방을 풀었다. 생수로 목을 축였다. 새우깡 맛이 짭조름한 눈물 맛이다. 예전, 나는 이곳에서 지금도 하는, 똑같은 고민을 했다. 내 꿈이 무엇인지, 내가 무얼 잘하고 좋아하는지, 내가 누구인지, 해답을 찾지 못해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까지 서성거렸다. 그때도 너는(자연) 나의 서성거림을 기다려주었고 나의 고민까지 보듬어주었다. 나를 낮추고 나를 비워야만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꽉 차서, 곪아 있던 마음에 바람이 분다. 조용조용 품어주고, 말없이 내어주는 너를 나는 사랑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순간의 황홀함과 강렬한 매혹과 이끌림의 시기를 거치며,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며, 사랑 자체를 계속 재발명해야 하며, 언어로서 계속 사랑한다고 선언해야 하며, 그 내용에는 충실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역시 언어로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이건 나에게 일종의 사랑의 모험이다.
코로나로 새삼, 너에게 더 고마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어느 날, 또 훌쩍 너를 찾아갈지 모르겠다. 너와 함께 한 이 멋진 날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