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마나 살겠어요?” 그가 던진 돌직구에 많이 당황했다. 일흔 살의 남자. 휠체어를 타고 온 초췌하고 검은 얼굴. 주사 자국으로 온통 푸릇푸릇해진 손등과 팔. 전형적인 말기 암 환자였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인 후, 나을 수 있는 병이니 너무 걱정 말라며 둘러댔다.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A 씨는 수년 전 악성 암의 일종인 흉막중피종으로 진단받았다. 이 질환은 석면에 장기간 노출된 사람에게 흔히 발생한다. 30여 년을 석면 노출 현장에서 일했다 하니, 이 초췌한 노인도 한때는 열정 넘치는 산업전사였을 것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수심이 가득한 그의 아내가 말했다. 대학병원에서 서너 달 넘기기 어려울 거라 했는데 본인은 정작 모른다고.

다음날 회진 때 심하게 숨을 헐떡이는 그를 만났다. X-선 사진을 찍어보니 가슴(흉강)에 물이 잔뜩 차 있다. 악성흉수! 이 질환의 말기 징표다. 흉강에 관을 삽입해 배액장치에 연결하려 했지만, 그로 인해 이미 심한 고통을 겪었다며 환자가 고개를 저었다. 주사기로 뽑아내기로 했다. 굵고 긴 주삿바늘이 흉막을 통과할 때 잔뜩 찡그린 환자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됐다. 아차! 마취가 풀렸나? 날카로운 통증이 뇌리에 전달돼 나도 그만 얼굴을 찡그렸다. 곧 핏기를 머금은 누런 액체가 1.5ℓ쯤 밀려 나오고 헐떡임이 잦아들자,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 이제 너무 편해요!” 하며 그가 활짝 웃었다.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사람의 억지웃음이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톨스토이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알지 못할 질병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져든 사람의 두려움, 혼란, 좌절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주인공 이반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에 더 시달리며 의사들을 불신한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가 죽을병이 든 것은 아니며 안정을 취하고 치료하면 좋아질 거라는 거짓말만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늘날의 의사도 말기 환자에게서 신뢰를 얻기 힘들다. 환자가 실망할까 봐, 혹은 가족이 원하지 않아서 환자 상태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스스로 병의 깊이를 어렴풋이 짐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불안할 것이다. A 씨는 어떤가? 자기 상태를 정말 모르는가?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자가 도저히 불가능한, 어떤 기대를 갖고 있다면, 의사는 그런 환자의 기대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추거나 높여야 한다. 끝까지 거짓말해야 하나? 나의 고민은 깊어갔다.

때로 의사의 말 한마디는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그에게 주어진 불확실성과 병적 상태는 환자 본인이 계속 씨름할 문제로 남는다. 어느 날,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A 씨는 육신이 점점 쇠잔해져 감에도, 마음은 더 높고 영원한 무엇을 추구하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이는 자신의 깊은 성찰이거나 어떤 종교적 힘이었는지 모른다.

마르지 않는 샘같이 흉강엔 계속 물이 찼다. 그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흉강 천자(穿刺)를 했으니, 이 일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반복됐다. 그래도 시술이 끝나면 언제나 활짝 웃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덜 아프게 보이고 싶다며 천자를 미리 해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었다. 가끔 친지나 교회 성도, 일터 동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의외로 밝은 환자의 모습을 보고는 반드시 병이 나을 거라 격려했다. 그럴 때면 “아무렴!” 하며 그도 맞장구쳤다. 그 의연한 태도 때문인지 어느 날 부인이, 남편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말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입원한 지 1년쯤 되는 날, 드디어 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기면서 온기가 사라져가는 그의 손을 잡고 작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당신이 희망을 버릴까 봐 그랬어요. “사실 그가 꼭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일종의 고해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순간 눈을 번쩍 뜬 그가 들리듯 말듯 대답했다. “다 알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다 알고 있었다니!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 짧은 말에 많은 뜻이 함축돼 있음을 알았다.

온갖 고통을 겪으며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이반이 말미에 습관처럼 익숙해졌던 공포를 잊어버린 것처럼, 그를 괴롭히던 모든 고통이 사라진 듯 얼굴이 편안해졌다.

2차대전 말 원폭 피해자였던 나가사키 의과대학 나가이 다카시 교수는 자전적 소설 ‘영원한 것을’에서 “인간의 야심이나 계획, 명예욕이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불멸의 것, 부서지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선택한다”고 했다. 그가 택한 것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의학 연구와 의료봉사 그리고 깊은 신앙 세계였다. A 씨 역시 병든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가 추구한 ‘더 높고 영원한 것’을 반드시 얻었기 바란다.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