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한국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정약용이란 이름 앞에 주눅이 들기 마련일 것이다. 저작이 방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중 어느 것 하나 당대 최고의 수준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다산만 그런 것도 아니다. 다산 시대의 여타 학자들도 전에 볼 수 없던 방대하고 다양한 저작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천재성, 학문적 열정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학자가 수많은 자료를 보고 방대한 저작을 남기려면 무엇보다 ‘눈’이 절대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하지만 늙어 원시가 되면 읽고 쓰지 못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눈의 노화는 학자에게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이다. 해결책은 단 하나, 안경이 있었을 뿐이다. 다산의 수많은 저작 역시 아마도 안경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안경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에 알려졌고 이내 수입되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사용한 안경은 북경에 가는 사신 편에 부탁하여 어렵사리 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조선에서도 안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렌즈의 재료는 수정이었고, 그 수정은 경주의 남산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이 수정으로 만든 안경을 흔히 ‘경주옥돌 안경’ 혹은 경주 ‘남석안경’으로 불렀다.

18세기 후반의 저명한 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눈이 아주 나빴다. 엄청난 독서가였던 그는 평소 잔글씨를 많이 본 탓에 약관 때부터 눈병이 있었고 서른일곱 살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안경의 품질이 썩 좋지 않아 상당한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다. 황윤석의 고통을 보다 못한 김이신(金履信)이란 사람이 1765년 경주의 수정으로 만든 안경을 하나 선물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안경이 꽤나 내력이 있는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기(閔機)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구한 것이었다. 민기는 1636년부터 이듬해인 1637년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직했으니, 그 안경은 1636-1637년 어름에 만든 ‘남석안경’이었던 것이다.

민기의 후손은 뒷날 조선 팔도에서 알아주는 집안이 된다. 즉 민기의 아들 민광훈(閔光勳)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민광훈의 아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숙종의 비)의 아버지였다. 이후 그의 집안은 조선 최고 벌열(閥閱) 가문이 된다. 김이신은 황윤석에게 그 안경이 민광훈의 아들인 민정중(閔鼎重)과 민유중,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閔鎭遠)[인현왕후의 오빠] 그리고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상(閔百祥)을 거쳐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한다. 안경 하나가 백 년을 넘어 전해진 것이었다. 황윤석은 이 안경은 바탕이 두터워 떨어트려도 깨지지 않는 튼튼한 물건으로 북경에서 산 안경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고 좋아하였다.

근래 장마가 한 달 보름을 끌고 폭우가 연일 쏟아졌다. 이런 기후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어릴 적 부산의 겨울은 추웠고 동네마다 빙판이 있어 거기서 얼음썰매를 탔다.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부산에서 얼음이 언 것을 보지 못했다. 기후가 변했고 변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기후변화가 인간을 절멸로 이끌 재앙으로 구체화될 것이라는 것, 따라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것 역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또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소비중독’이다. 그것은 결국 지구 자체의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최종적 가치가 오직 ‘소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유’로 설정돼 있는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없는 한 기후변화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안경 하나를 백 년 이상 물려가며 썼던 것은, 사회 자체의 가난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 가난한 사회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목전에 닥쳐 있는 기후변화의 정황을 보고 나는 도리어 그 가난한 세상을 새삼 떠올린다. 지난 6월 말 타계한 생태운동가 김종철 선생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인간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만족스러운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을 곱씹으면서 평소 존경하던 선생께서 저 건너 세상에서 영면하시기를 빈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