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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손재형의 ‘승설암도’

  • 황정수 미술평론가
  •  |   입력 : 2020-08-18 19:05:13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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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배정국(裵正國)이란 이가 있었다. 인천 출신 사업가로 서울 광교에서 ‘백양당(白楊堂)’이란 양품점을 하는 부자였다. 다방면에 교양이 풍부해 그의 성북동 집 ‘승설암(勝雪庵)’에는 문인, 서화가, 골동 수집가 등 친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집 안에는 잘생긴 소나무와 큰 오동나무 두어 그루가 있었으며, 많은 화초가 자라고 있었다. 그의 취미는 서화골동 수집이었는데, 특히 조선백자를 많이 모았다. 이런 취미는 근처에 살던 김용준이나 이태준, 김환기의 영향이 컸다. 그는 사업가답게 작품이 마음에 들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인 것으로 유명했다.
손재형이 그린 ‘승설암도’. 개인 소장
또한 배정국은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백양당‘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이태준 정지용 등의 책을 내며 본격적으로 출판을 시작한다. 시집 소설집 평론집 등 주로 새로운 사조에 맞는 책을 많이 내 진보적인 출판사로 유명했다. 그는 책의 장정도 직접 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 재주 많은 이였으나, 6·25전쟁이 나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후 집안은 쇠락하고 그의 재산과 수집했던 작품은 모두 흩어져 버린다. 그가 살던 승설암은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尋牛莊) 앞 큰길가에 남아 있는데 현재 음식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1945년 봄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승설암으로 모였다. 서예가 손재형, 화가 김환기, 소설가 이태준, 도자기 수집가 함석태, 동양화가 조중현 그리고 모암(慕菴)이라는 호를 쓰는 인물과 집주인 배정국 등 6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시간이 흐르고 흥이 무르익자 이태준은 좌장 격인 손재형에게 오늘 일을 기념하여 그림 한 장 남겨 달라고 부탁한다. 마치 조선 시대 시인 묵객이 모여 즐기던 ‘시사(詩社)’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자 손재형은 주저하지 않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이루어진 작품이 바로 ‘승설암도(勝雪庵圖)’이다.

손재형은 당대 최고 서예가이기도 하였지만 문인화에도 능한 재주 많은 예인이었다. 그는 먹만으로 능란하게 배정국의 집을 그린다. 자신이 일본에서 어렵게 찾아온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를 생각하듯, 갈필로 승설암의 아름다운 마당을 그려낸다. 담 왼쪽에 태호석이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오른쪽에 이 집의 상징과도 같은 오동나무 두 그루가 입 떨어진 채 높이 서 있다. 담 바깥 왼쪽에는 기와집의 지붕만이 배경처럼 보인다. 그림 구성이 마치 ‘세한도’의 그것과 닮았다. 김정희가 구현한 원나라 화풍이 손재형에 의해 현대화된 모습이다. 닮은 듯하나 새로우니 이 또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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