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요원의 으뜸 수칙은 잠행이다.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정보요원의 가치가 상실되어서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은 2007년 9월 이 근본원칙을 깨버렸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납치된 샘물교회 교인들의 석방 교섭을 지휘한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언론에 등장해 석방 경위를 전격 공개한 것이다. 실무협상을 맡은 국정원 요원들도 언론에 노출시켰다. 그의 돌출행동은 정계 진출 욕심 때문이었다. 위키리크스가 밝힌 주한미국대사관의 비밀전문을 보면, 청와대는 그에게 그림자처럼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2008년 총선 출마를 꾀했던 그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김 전 원장의 일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2007년 12월 18일, 그는 갑자기 방북해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만났다. 그리고 이듬해 1월 9일, 한 언론사에 김양건과의 대화록을 유출했다. 대화록에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 이 후보가 더 과감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다”는 그의 발언이 기록돼 있다. 당선이 유력한 이명박 후보의 환심을 사서 ‘노무현 정부 국정원장’이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는 결국 대화록 유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문재인 정부의 첫 국정원장인 서훈 현 국가안보실장도 같은 이유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5월 21일,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과 만찬 회동을 하는 장면이 한 인터넷 매체에 의해 고스란히 노출되면서다. 당시 영상에는 서 실장은 물론 국정원 직원들도 나온다. ‘음지에서 일한다’ ‘무명의 헌신’ ‘소리없는 헌신’ 등 정보요원의 본분을 규정한 역대 원훈들이 무색해지는 파행이라는 비판이 쏟아진 건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4·15총선의 전략가로 활약한 여당 실세인 양 전 원장과의 만남이었으니, 정치와 정보의 ‘위험한 교류’는 여전했던 셈이다.
서 실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지원 현 국정원장도 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최근 페이스북에 “애들과 아내에게 가려다 폭우로 연기했다. 교회에 간다”고 자신의 동선을 공개했다. “SNS 활동을 중단하고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한 달 전 국정원장 내정 때의 다짐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직 자신을 정치인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정보기관이 확실한 정치적 중립 기반을 닦아 국민의 일꾼으로 거듭나는 날은 언제일까. 고대하다 눈이 빠질 지경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