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몰랐던 걸까.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진보는 지키고, 보수는 버릴 것이란 생각은 순전히 선입견이었다. 자유가 곧 민주는 아니라는 믿음을 되새기게 했다. 규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기에.
최근 논란이 됐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정책의 유례를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린벨트 제도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보수 우파의 영웅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영국 제도를 본떠 1971년 도입했다. 6년에 걸쳐 전국 14개 도시권에 전 국토의 5.4%를 그린벨트로 묶었다. 추진 과정에서 시장경제에 맞지 않는 악법이라는 반발이 많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불같은 추진력으로 밀어붙였다. 해외에서도 우리의 그린벨트 제도가 성공 사례로 소개된다고 한다.
그러면 역대 정부 중 그린벨트를 누가 가장 많이 풀었을까. 국민의 정부다. 793.6㎢나 해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예 그린벨트 해제를 1997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명분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외국인 투자 유치와 서민 주거안정이었다. 환경단체는 크게 반발했지만, 추진됐다.
그다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참여정부는 654㎢를 해제했다. 국민임대사업과 중·소도시권 해제가 명분이었다. 보수 정권은 상대적으로 해제 규모가 작았다. 이명박 정부는 75.18㎢, 박근혜 정부는 32.8㎢를 해제했다.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공급 정책을, 박근혜 정부는 민간기업형 임대주택 정책 추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의외로 군사정권은 그린벨트 정책을 잘 지켰다. 철권통치를 하던 전두환 정부조차 논의만 하다 그칠 정도였다. 노태우 정부는 금기시되던 그린벨트 완화를 처음 단행했지만, 규모는 전국 30곳의 3.7㎢ 정도였다. 명분도 국민 휴식 공간 확대였고, 생활체육시설로 개발됐다. 문민정부는 그린벨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또 재미있는 점은 묶을 때와 풀 때의 명분이다. 그린벨트 제도는 무질서한 도시의 확산 방지, 특히 서울 팽창을 막는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실제 1971년 7월 30일 서울 지역이 처음으로 그린벨트로 묶였다. 그런데 풀 때의 명분은 대부분 주거 안정이었다. 그것도 수도권, 특히 서울 집값 안정이 주된 이유였다. 이는 수도권 팽창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헷갈린 것이다. 진보는 환경 정책에 더 엄격할 것 같았다. 보수는 성장 위주의 개발 정책을 편다는 생각이 강했다. 여기에는 진보는 규제를 강화하고, 보수는 규제를 완화할 것이란 선입견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진보는 풀고, 보수는 지켰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긴 걸까.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이런 주장을 한다. 진보 정권의 경제 정책은 정치나 대북문제와 달리 시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는 진보 진영이 군사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에 저항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통제나 규제를 받지 않는 걸 민주로 여긴다는 것이다.
역시 역사는 교훈을 많이 준다. 문재인 정부도 최근 그린벨트 해제를 검토하다가 철회했다. 참여정부 가치의 계승을 표방하는 정권이기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추진 명분은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집값 안정을 위해, 그것도 강남 집값 안정이었다. 의아한 점은 그린벨트 해제가 집값 안정에 도움이 되느냐는 논란이 있는데도 추진한 사실이다. 그린벨트 해제는 오히려 부동산 투기 바람을 거세게 일으킨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 그린벨트를 해제하면 개발 이익을 노린 투기가 벌어진다는 사실은 1990년대 이미 경험했다. 해제 지역은 물론 주변의 부동산에 자금이 몰리고 가격이 폭등했다.
수도권 집중화 현상의 심화가 뻔한데도 추진된 것 또한 이해 안 된다.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를 건설하면 또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이다. 수도권 과밀화는 지방 소멸을 앞당기는 부작용을 낳는다. 무엇보다 이는 참여정부 최대 업적인 국토균형발전 정책의 사실상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 추세가 지속하면 30년 후에는 시·군·구 37%, 읍면동의 40%가 사라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에 당부한다. 규제는 기준이 중요하다. 그 자체가 좋고 나쁜 게 아니다. 물론 기준은 다수, 대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운동장이 소수에 기울어져 있다면, 균형을 맞추는 게 필요하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편차는 이미 위험수위다. 기회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고 균등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진영논리에 묻히면 시대정신을 잊게 된다. 이기고, 지는 것만을 생각하게 된다. 정책 결정 기준을 간과하기 쉽다. 이는 곧 실정으로 이어진다. 피해는 국민이 입는다. 여기서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 하나. 그린벨트 제도는 지켰으면 좋겠다.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