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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인간의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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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자이자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인 빅터 프랭클(1905~1997) 박사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사람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붙잡혀 수용소에 끌려간 그는 몇시간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동료의 시신을 옆에 두고 밥을 먹어야 하는 지옥에서 3년을 보냈다. 하지만 나치가 마지막까지 빼앗을 수 없는 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라 생각했고 그걸 지키는 방편이 세수와 면도였다. 그는 주운 유리조각으로 매일 아침 식판 뒷면에 얼굴을 비추며 면도를 했다. 타인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것도, 그걸 지켜내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다.

한 헌법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제헌 헌법부터 1960년 헌법까지 존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1962년 1969년 1972년 헌법에서 한번씩 등장하고 1980년에는 세번, 현행 1987년 헌법에도 세번 나온다.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제10조, 근로 의무와 권리를 규정한 제32조, 혼인과 가족생활의 양성평등을 규정한 제36조가 그것이다. 이후 헌재 결정문에도 존엄이라는 표현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인권이 가장 무시되던 권위주의 시절 개정된 헌법부터 존엄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이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으로부터 4년간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며 고소한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의 발인 당일 세상에 내놓은 호소문의 일부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 분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다’. 호소는 “살려달라”는 절규이다. 국민의 존엄과 가치는 불가침의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서울시는 피해자를 외면했고, 그의 고소 사실은 경찰 접수와 거의 동시에 피고소인인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됐다고 피해자측은 폭로했다. 피해자가 간절히 원했던 안전한 울타리는 어디도 없었다.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인간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쾌락이나 욕구 해소의 수단인 사례를 우리는 너무 자주 접한다. 박 전 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도 피해자가 겪어야했을 고통과 공포에 먼저 공감하는 게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내팽개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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