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세차게 창을 두드린다. 이런 날이면 아껴두었던 몇몇 레퍼토리가 음악 공간 필하모니를 가득 채운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트리오 2번 ‘엘레지’,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협주곡 2번 2악장,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 어떤 이는 궂은 날씨에는 밝은 음악을 듣는다고 하지만, 필자는 궂은날에는 회색빛 음악 또는 철학적이며 장중한 음악이 가슴에 와닿는다. 어떤 날엔 멜랑콜리(우울)도.
 |
|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가 연주한 ‘월광소나타’ 음반. |
“비 오는 날 듣는 ‘월광’도 괜찮은데….” 코로나로 뜸했던 단골 고객 B 씨가 필하모니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반갑게 웃는다.
어쩌면 엉뚱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한때 이 곡을 들으면 달이 있는 풍경을 곧잘 떠올리곤 했으니 말이다. 독일 베를린의 음악평론가이자 시인 레일시타프 루드비히가 이 곡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1악장을 듣다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와 같다”고 비유하면서 ‘월광곡’의 꼬리표를 달게 됐다.
몇 년 전 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사이에 흐르는 네레트바강을 찾았다. 그 강에서는 ‘스타리 모스트’라는 다리가 국경을 잇고 있었다. 유고 내전의 처참함을 안고 파괴되었던 이 다리는 2004년 복원됐고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다리 입구에는 ‘1993년을 잊지 말자’며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고, 여행객을 위한 기념관 한편에는 보스니아 내전 참상을 알리는 화면이 나오고 있었는데, 배경 음악으로 베토벤의피아노 소나타 14번 1악장이 흘러나왔다. 순간 필자는 가슴 깊이 전율이 느꼈다.
그때 들었던 ‘월광소나타’는 또 하나의 경험으로 가슴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정작 베토벤은 이 곡을 젊은 날의 정열과 사랑의 괴로움을 나타낸 “환상곡 풍의 소나타”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대개 한 시인의 감성을 그대로 답습한 ‘월광소나타’로만 각인돼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은 ‘월광’으로 불리는 1악장도 아름답지만, 3악장의 빠른 템포는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8번 ‘비창’의 3악장과 함께 가장 격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악장으로 손꼽힌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에밀 길렐스의 피아노 선율이 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프랑스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 오른다. “난 널 사랑해. 오! 울고 있는 물소리, 마치 작별인양 흐느끼는 물소리, 너는 곧 떠나려 한다. 마치 네 두 눈 속에서 비가 오는 것처럼.“
명반이 너무 많아 따로 추천할 음반은 없다, 필자가 자주 듣는 연주는 전곡으로는 에밀 길렐스, 1악장은 이스라엘라 마가랏트 정도다. 필하모니 대표·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