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표준과 권력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뿐만 아니라 법은 규율과 처벌의 실제이기도 하다. 나아가 통제의 이미지와 그 현실적 작동 가능성은 사슬처럼 연관되어 있기에, 서로를 강화하는 양상을 띤다. 교묘하고도 무서운 것은, 일단 그러한 법의 사슬에 걸려들면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예속을 느끼고 법과 무관하게 살겠노라 결심한다고 그리 쉽게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법의 사슬은 그에 개입된 존재들을 더욱 옥죈다.
법이 딱딱하고 완고하긴 하지만 사슬적인 성격만으로 법이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의 사슬이 공고해지는 것은 법의 사슬이 적당한 말뚝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사슬은 떨어질 수도 있고, 그렇게 바닥에 놓인 사슬은 그저 넘어 버리거나 사뿐히 밟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군데군데의 튼튼한 말뚝에 어느 정도 땅에서 거리를 두고 수평으로 단단히 걸린 사슬은 그것을 풀어낼 길이 막막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법의 말뚝으로 작용할까? 그 첫째는 이른바 법이 표방하는 가치이다. 예컨대 평등이 그러하다. 일찍이 민중의 보편적인 해방의 기치로 제시되었으며 작금에도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평등에 대해 말뚝이라니,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평등은 헤겔이 분석한, 지배복종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둘 다 죄수와 마찬가지로 결속된 주인과 노예 간의 사슬을 풀어줄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평등이 종래의 것만을 기준으로 이해되고 추구되는 한 그 기존 잣대는 은근히 강력한 말뚝의 힘을 발휘하여 다른 지향으로의 모색을 저지하곤 한다.

어떤 법의 이념이 그 자체만으로 말뚝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답적인 개념처럼, 말뚝의 느낌이 있는 것이더라도 사슬로 연결되어야 말뚝으로서의 몫을 해내는데, 법의 말에 말뚝의 위상을 부여하고 그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사회구성원들이다. 심지어 법을 만들었던 자들, 법을 속박의 양식으로 운영했던 자들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종종 살아있는 사람들이 예전의 방식으로 말뚝에 사슬을 칭칭 감아 나눠 둠으로써 법의 말뚝과 사실을 정녕 한 쌍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아가, 이곳저곳의 참여자들 스스로 말뚝이 되어 다른 이들까지 몽땅 그 사슬의 연쇄 안에 가두기를 원하게 된다.

공정을 둘러싼 근래의 혼란스런 논의에서도 그와 같은 법의 말뚝과 사슬이 비친다. 경쟁이라는 사슬에 묶여 비슷비슷하게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져 온 이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적은 기회들은 흔히 경쟁의 대상으로 먼저 간주되고, 같음에 대한 말뚝적인 이해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경계와 제어의 사슬이 가동된다. 사슬을 휘두르거나 들고 있는 쪽이든, 사슬에 맞거나 그에 묶이게 되는 몸이든, 사슬의 회로 안에 있으면서 그를 지속시킨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니 이는 우리 공통의 불행이다.

그런데 그처럼 서로 질시하고, 무거운 사슬을 철거덕거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당연히, 없지 않다. 족쇄를 철폐해 온 투쟁의 역사와 성공의 경험이 있는 만큼, 사슬과 말뚝 어느 것이든, 혹은 전부를 다 깨부술 수 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지도 모른 채 어느새 수행하고 있는 말뚝의 임무에 의문을 품고, 삶을 협소하게 규정해 온 사슬을 없애고자 결심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마르크스가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에 녹아내린다’고 했는데, 그것들을 녹일 수도 있다. 법이 뭐라고, 볼썽사납게 전락한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직시하고 제대로 부끄러워 한다면 많은 것을 다시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대중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일이기에 녹록치 않게 느껴진다면, 허먼 멜빌이 보여준, ‘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는 바틀비처럼, 쥐고 있던 사슬을 놓아버림으로써 말뚝이 말뚝 구실을 못 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더 나아지도록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오정진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