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시 법기리에는 옛 가마터들이 있다. 그중 4호 가마터는 1963년 사적 제100호로 지정됐다. 이곳에서 구워진 사발들이 조선 시대 두모포 왜관(1607년 부산 동구 일대 설치) 시대부터 개시(開市)를 통해 왜관에 납품됐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16세기 말엽부터 17세기에 걸쳐 일본에서는 새로운 사조의 ‘와비차(茶)’가 크게 유행함에 따라 부산 근교의 민간요(窯)에서 생산된 각종 사발이 차완으로 애용됐다.
조선 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간 과정을 짚어보자. 왜관의 장날 부산 근교 사기장들이나 보부상들이 일본 측에 팔았다. 왜관 관수(館守·왜관 책임자)가 이 사발들을 세견선에 싣고 대마도에 옮기면 대마도주는 일본 규슈의 하카타, 오사카의 사카이, 교토, 나라 등지에서 일본 각지로 공급했다. 그중 동래부에서 가까운 부산 금정구 남산동, 두구동, 법기리 등의 요지에서 생산된 사발이 일본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 사발들은 일본 각지 유명한 박물관 등에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 이름이 우리말로는 없다. 일본 이름으로 소개하면 이도(井戶), 고키(吳器), 토토야(斗斗屋), 카키노헤다, 이라보(伊羅保), 고쇼마루(御所丸) 등으로 호칭되는 사발들이다. 이 가운데 굽 안을 소용돌이 꼴로 깎아낸 이라보의 사금파리 몇 점이 법기리 일대에서 수습돼 ‘경상남도 동부지역 가마터 지표조사 보고서’(국립중앙박물관, 2018년 12월)에 실렸다. 그러나 발견된 장소의 위치(좌표), 조사자, 가마구조, 폐기장, 소성불꽃, 태토 등 연구에 필요한 기록 내용이 없거나 애매하다.
따라서 이라보 계통의 쿠기보리(釘彫), 카타미가와리(片身替), 키(黃)등으로 분류되는 사발들이 일본인의 주문품으로 법기리 요지에서 구워진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 왔으나 지금껏 학술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법기리와 두구동 일대에서는 1950년대만 해도 고키, 토토야, 이라보 등 조선 사발 파편을 흔히 수거할 수 있었다. 이 도요지들이 도시 개발로 모두 사라지고 남산동 부산외국어대학 내에 분청사기요지 1기가 매장문화재로 남아 있다. 고키는 애초 이 일대에서 고졸한 원형이 출토됐으나, 현재는 울산시 울주군 천황산요지 사적 129호에서 백자 고키의 사금파리들이 수습된다.
일제강점기에 교토의 도공 마시미즈조로쿠(眞淸水藏六)는 1910~1912년에 걸쳐 조선을 여행했다. 창기동(양산)이란 곳의 조선인 도자기 작업장을 방문해 작업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는 회고록 ‘장육필만고도록(藏六筆漫古陶錄)’에는 창기동에 도요지 18기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교토에서 1931년까지 조선 사발 등을 재현했다. 1916년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이었던 노모리겐(野守健)도 경상남도 양산군 창기에 이라보 도요지가 있었다고 했다. 가관인 것은 당시 옛 도자 연구가로 자처했던 많은 일본인 애호가들이 전공자가 아니었는데 조선에 오면 문득 ‘전문가’인 양 변신했고, 또 조선총독부에서 경제적 후원을 받아 도요지들을 파헤치고 교란했다.
일본차회기를 관찰하면 일본의 이라보 계열 사발들은 본래 에도장군부에서 활동한 고보리엔슈(1579~1647)가 디자인한 차완이다.
1928년 조선 사발인 핑크빛 고키(紅葉吳器) 차완 1점을 오사카의 재벌 히로오카가(廣岡家)에서 18만9900엔에 낙찰받는다. 당시 도쿄의 초등학교 교사 초봉이 50엔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이 금액은 이들이 300년 동안 근무해야 모을 수 있는 상상 이상의 천문학적 가격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옛 도자기에 관심이 있었던 일본의 애호가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던 것은 이렇게 일확천금 찬스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조선 민가에 조상처럼 모셔졌던 각종 도자기가 일본인에 의해 싹쓸이되어 일본으로 가버렸다. 굴지의 민예론자 야나기 무네요시도 하동에서 웅천사발(이도차완) 2점을 샀는데 현재 1점이 도쿄 일본민예관에 전시돼 있다. 도자기가 바닥이 나자 1910년 ‘비원자기’라는 브랜드로 서울 창덕궁에 조선 도자기를 재현하는 공장이 설립됐다.
부산에도 유명 수집가인 가시이가(香椎家)의 판매 목록에도 재현품 공장인 ‘고려야키’가 기재돼 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재현품 붐이 일어났을 때, 전세품(傳世品·예부터 소중히 다루어 전래된 물건)보다 우수한 제품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이로 인해 한국의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의 체계가 무너지고, 어느 것이 진품인지 아리송하게 됐다.
법기리 가마터에서 수집됐다는 굽 안쪽 소용돌이 꼴의 이라보 파편들의 정체가 17세기께 대마도의 주문품인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재현품인지는 곧 있을 발굴조사를 통해 그 진실이 드러날 예정이라 벌써 마음이 설렌다.
경성대 공예과 교수·㈔부산문화유산연구회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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