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잊혀지는 속도가 빠르다. 정의당 이야기다. 존재감이 예전 같지 않다. 21대 국회에선 거대 정당만 보인다. 진보 의제인 기본소득 논쟁도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주도한다. ‘6석 미니정당’의 목소리엔 메아리가 없다. “대중적 진보정당 20년 역사에서 가장 큰 혁신이 필요한 때”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 16일 유튜브로 중계된 정의당 부산시당 당원토론회에서도 ‘위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정의당은 20대 국회에서도 6석이었다. 그때는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정의당 눈 밖에 난 인사청문 후보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현정길 부산시당 위원장은 “20대 국회에선 ‘4+1’ 협치가 불가피했다. 지금은 여당 단독으로 모든 걸 할 수 있어 논의 구조에서 배제된다”고 진단했다. 슈퍼여당의 독주가 정의당 위기의 한 원인이라는 의미다. ‘민주연합을 통한 세력 확장’ 노선 역시 지지세로 연결되지 못했다. 오히려 ‘민주당 2중대’란 비아냥만 들었다.
한편에선 거대 양당이 진보정당의 의제를 자기들 것으로 흡수했다. 기본소득이 대표적이다. 정의당 대표 공약인 기본소득이 주목 받은 시기는 김경수 경남지사·이재명 경기지사가 ‘재난기본소득’을 제안한 지난 3월이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잠룡들이 찬반 입장을 쏟아내면서 기본소득 논쟁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복지와 증세로까지 전선이 넓어졌다. 그러는 사이 기본소득의 ‘저작권자’인 정의당은 잊혀졌다. 촌철살인의 ‘대명사’ 노회찬 전 의원이라면 ‘정의당=기본소득’ 메시지를 어떻게 발산했을지 궁금한 대목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단계는 아니다. 유권자는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정당득표율(9.67%)이 말해준다. 정의당이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한국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여의도를 달군 수 많은 ‘의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정의당이 있었다. 이른바 ‘소문의 진원지’였다. 탈핵 정책은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폐로로 현실화됐다. 최근 청와대가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 논의 중인 ‘고용보험 적용 대상 확대’도 10년 전 정의당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던진 화두다. 무상급식·무상교육 확대와 ▷기초노령연금·아동수당 도입 ▷선거연령 하향(만 18세) 역시 시간차를 두고 실현됐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위기 돌파를 위해 꺼낸 그린뉴딜 정책 또한 지난해 9월 정의당 ‘그린뉴딜경제위원회’가 먼저 고민했다. ‘6석 정의당’이 힘을 내야 하는 이유다.
정의당은 이제 새로운 길 위에 섰다. 새 정체성을 고민할 혁신위원장은 30대 장혜영 의원이 맡았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출신인 장 위원장은 2011년 연세대를 자퇴하면서 고려대·서울대 자퇴생들과 함께 ‘SKY 자퇴생’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 3월 “정의당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임명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밝히지 못했다”고 해 주목받았다. 장 위원장은 “정의롭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시 규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혁신의 관건 중 하나는 외연 확장이다. 전통적 지지기반인 대기업 노동자들이 점차 기득권층이 돼 간다는 비판이 나오는 현실에서 플랫폼·비정규직·청년 노동자와 어떻게 연대하느냐가 중요하다. “부산지하철 청소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했나. 단지 논평 하나 내고 말았던 게 아니냐”는 내부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지지 기반과 노선을 재정립하면 그에 맞는 정책이 나온다. 기본소득만 해도 그렇다. 잠룡들은 기본소득 찬반 논쟁에 머물러 있다. 집권을 꿈꾼다면 더 구체적이면서 ‘정의로운’ 로드맵을 내놔야 한다. 단순히 현금 얼마 지급이라는 작은 그림에 묶이지 않고 ‘K-복지모델’ 설계까지 공론화 영역을 확장해야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정의당이 ▷증세를 통한 복지 확대 ▷ 기존 복지를 축소해 재원 마련 ▷선별적 기본소득 지급과 같은 중구난방 속에서 국민이 공감할 만한 대안을 내놓아 ‘빵 먹을 자유’의 해법을 내놓을지 지켜볼 대목이다.
정의당은 존재 자체로 우리나라 정치의 긴장감을 높였다. 정의당의 저작권이 넘쳐날수록 한국 정치는 빛났다. 어려운 정치환경 속에서도 단 몇 석만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왔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한 17대 국회에서도 ‘거대한 소수’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때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어젠다를 대중운동과 결합해 증폭해낼 줄 알았다.
정의당은 오는 21일까지 지역별로 ‘정의당 혁신 공론장’을 열어 혁신안 의견 수렴을 마친다. 최종 혁신안은 오는 8월 채택된다. 진보의 ‘효능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수요자 입장에서 가장 좋은 정책을 쇼윈도 맨 앞에 내놓을 수 있을까. 유권자들이 ‘6411번 버스’에 열광했던 그 날이 다시올까. 정계 입문 8개월 차 혁신위원장이 진보 재건의 청사진을 펼쳐 보일 수 있을까. 국회 관전포인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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