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장 그르니에는 이런 햇살을 보며 다음과 같은 산문을 썼다. “햇볕이 가득 내리쪼이는 풍경을 보고 사람들은 어찌하여 상쾌한 풍경이라 말하는가? 태양은 세상을 공백 상태로 만들어 놓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저 자신의 모습과―아무런 기댈 곳도 없이―대면하게 된다.” 백일(白日)은 오히려 상쾌함을 느끼게 하는데, 그 이유인즉 태양으로 인해 존재들이 가식 없이 자신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햇살을 피하려는 인파는 점점 더 짙어지는 나무 그늘로 들어가게 된다. 도심 곳곳에서는 분수가 물을 세차게 내뿜어 청량감을 안겨준다. 며칠 전 날이 덥다며 한 지인이 선물을 보내왔다. 부채였다. 요즘 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지만, 막상 부채를 들고 다니며 흔드니 바람이 일어나 금방 땀을 식혀준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부채만큼 그 활용이 떨어진 것 가운데 하나는 손편지가 아닐까 싶다. 굳이 손편지가 아니더라도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졌다. 아무래도 전자우편을 이용한다면 빠르게 소식을 전달할 수 있다. 삐뚤빼뚤 손글씨를 쓰거나 우체국을 방문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도 있다. 그러나 손편지가 가져다주는 정감은 무시하기 어렵다. 나는 가끔 지인들로부터 손편지를 받는다. 대개는 새로 펴낸 시집을 부치면 감사의 마음을 담은 회신으로 손편지를 보내온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내오는 지인들도 있다. 나는 내게 보내온 지인들의 손편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꺼내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그 손편지는 또다시 그 어떤 샘물 같은 위안을 안겨준다. 다시 읽지 않고 용건만 확인한 후 대개는 삭제하게 되는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보다는 이른바 유효기간이 훨씬 긴 셈이다.
기억에 남는 손편지 가운데 하나는 군대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께서 보내온 편지였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에 어머니의 편지를 뜨거운 눈물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이 손편지의 위력을 알기에 나는 가끔 가족들에게 짧은 손편지를 쓴다. 다소는 형식적인 문장들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속내를 솔직하게, 그리고 소상하게 쓰려고 애쓴다.
그런데, 이러한 손편지를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좀 써보는 기획에 동참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 최근에 있었다. 한 도시의 시립도서관에서 온 제안이었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분이 힘든 시기를 겪는 만큼 작가가 쓴 손편지가 독자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독자가 작가에게 자기 사연을 적어 편지를 보내면 작가가 손글씨로 직접 답장을 보내드리는 식이었다. 기획 프로그램 이름은 ‘당신을 위한 손편지, 작가가 건네는 은밀한 위로’였다. 이해인 수녀님과 백세희 작가가 참여한다고 했다. 나도 흔쾌히 함께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손편지의 위로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태주 시인의 시 ‘슬이’를 떠올렸다. “사람이 꽃같네/ 옛말// 오늘 나는/ 고쳐 말하네// 꽃이/ 사람이 되었네”라는 짧은 시였다. 이 시는 꽃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꽃 그 자체가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 보다 사람의 존재를 귀하게 보는 셈이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그 어떤 일을, 고통을 덜어주는 그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무척 소중하다. 불교의 경전 ‘유마경’에서 “자기가 병들었을 때를 견주어 타인이 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 환자를 애민히 여겨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손편지를 통해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감시켜줄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다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아무도 조언을 바라지 않는다. 사실(고통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전인 시인은 시 ‘허공’에서 “네가 있어 나무는 나무가 된다// 네가 있어 바람은 제 길을 간다// 네가 있어 비로소 온전하게 되는// 앞뒤 툭 터져// 시퍼보이는”이라고 썼다. ‘시퍼보이는’은 만만하게 보인다는 뜻의 전라도 방언이다. 허공이 있어 나무는 나무가 되고, 허공이 있어 바람은 바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 곁에 있어 비로소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내가 손편지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조언의 차원이 아니라 나무 곁에 있는 허공이 되는 것, 바람에게 길을 내주는 허공이 되는 일일 뿐이다. 물론 이것만을 잘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눌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가로채고 참견하고 부정하곤 한다. 그 사람이 말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게 해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한다. 허공이 되는 일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고통이 있다면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일도 필요하다.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 문장을 썼다.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만 한다. (……) 걷고 싶으니까 걷는다. 그러면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생각하고 싶으니까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걷거나 생각하는 것은 보행과 사색의 타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본래의 활동 이외에 어떤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은 활동의 타락이 된다.” 이 문장들에도 자기 존재의 목적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당신을 위한 손편지, 작가가 건네는 은밀한 위로’ 프로그램을 통해 내게 사연을 보내온 독자에게 답장으로 내가 손편지를 보낼 때에 어떤 문구를 꼭 써넣을지도 생각해보고 있다. 염두에 두고 있는 하나의 문구는 ‘생이여! 한껏 발 쭉 뻗어라’이다. 이 문구는 언젠가 읽은 시구이지만, 위로라는 것, 그것이 하는 가장 큰 일은 발을 뻗을 기회와 공간을, 쉴 기회와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