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가 오늘날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나름 잘사는 것은 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충일 오전 10시, 우리가 전국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옷깃을 여미며 묵념하는 것은 이분들께 새삼 감사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대한민국이 건재하는 한 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은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신 장인, 신수명 선생을 생각하는 시간이 사뭇 길다. 선생은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효고현 히메지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1년부터 한국인 학우들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민족의식 고양과 동지 확보에 주력하다 1943년 4월 일경에 체포돼 온갖 고초를 겪으며 감옥살이했다. 어른은 해방 후 귀국하여 교육자로 평생을 보내시고 2007년 3월 83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후손과 그를 기리는 사람들 마음속에 오늘도 살아 계신다.

6월에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또 있다. 자기 친지 중에도 국가유공자가 있다며, 장인어른을 무척 존경하던 C 씨다. 2014년 6월 나는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지난 33년은 획 지나간 것 같은데 남은 50여 일이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어느 날, 누가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이어 들어선 이는 환자 C 씨의 장남이었다. C 씨는 내가 최초로 집도한 심장이식수술의 수혜자다. 그해 들어 ‘다장기 부전증’에 빠져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의학이 발전해도 한계를 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아들은 어머니가 의식마저 혼미한 상태이니 인근 요양병원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병원을 옮기고 일주일 뒤 그녀의 부음을 접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내가 보낸 근조화환이 먼저 눈에 띄었다. 내 퇴임식에 참석해 축하해줄 걸 기대했는데, 반대로 내가 그분 영전에 엎드리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로부터 17년 전, 10여 차례 동물실험을 끝낸 후, 말기 심부전을 앓던 C 씨를 만나 물었다. “정말 이곳에서 수술받으시겠습니까? 처음 하는 수술입니다.” 오랜 세월의 주치의를 떠나기 싫었던지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선생님이 꼭 해주세요!” 아무튼, 인체에 하나뿐인 심장을 통째로 기증받아야 하니 뇌사자 발생을 기다려야 했다. 한 달여 초조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C 씨에 맞는 뇌사자가 나타나,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그는 의외로 담대했다. 오히려 집도자인 나는 바짝 긴장했다. 하기야 의사가 된 뒤 처음 하는 의료행위는 항상 긴장되고 어려웠다.

처음 환자, 처음 대면, 처음 검사, 처음 수술…. 환자의 병든 심장을 들어내고 뇌사자의 건강한 심장을 4시간 안에 떼었다 붙여야 하는, 시간을 다투는, 심장이식은 더욱 그랬다. 다행히 수술은 순조로웠고, 말미에 이식된 심장이 힘찬 박동을 시작했다. 잠시 멈췄던 뇌사자의 심장이, 이제 그의 심장이 되어, 매분 5000㏄가량 피를 펌프질해 몸 구석구석 신속히 공급했다. 1997년 9월 23일. 이른바 한강 이남 최초 심장이식 수술이었다. 이후 우리는 서로 다독이며 깊은 교감을 나눴다. 그의 자녀 결혼식에 내가 주례를 서기도 했다. 가끔 나더러 생명의 은인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나는 오히려 그가 더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C 씨는 수술 후 많이 달라졌다. 만사에 소극적이던 오십대 여성이 활동적인 사십대 남성 같이 변했다. 사경을 헤매다 건강을 되찾았으니 당연한 변화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식수술을 받은 뒤 환자의 취향이나 기질이 달라지는 것을 가끔 보았다. 심장 제공자를 닮아가는 것 아니냐, 혹 심장이 기억하고 감정을 인지하는 기관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심장이 기억하거나 감정을 인지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이다. 흥분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맥박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심장에 있는 양 착각한다. 심성 고운 사람을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하고 냉정한 사람을 심장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C 씨는 건강을 회복한 뒤, 새 생명을 주신 분께 보답하는 길이라며, 이곳저곳에서 열심히 자원봉사하고, 이식수술 대기 중인 환자들께 걱정 말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런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무척 힘들게 했다.

그러나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서 죽음을 예감한 로버트 조던은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에게 말한다. “이제 당신은 곧 나야.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우린 모두 있는 거야.” 강직하고 경건했던 장인어른의 모습이 내 안에 고스란히 살아있듯, 내 험난했던 흉부외과 의사의 길 위에 C 씨와 함께한 날들도 항상 살아있을 것이다. 신록의 계절에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자.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장